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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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 思悼世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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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35년 2월 13일
조선 한성부 창경궁 집복헌
책봉 1736년 4월 25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인정전
사망 1762년 7월 12일(향년 27세)
조선 한성부 창경궁 휘령전 앞 뒤주
능묘 융릉

사도세자

조선의 왕세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영조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이다. 정실 아내는 혜경궁 홍씨이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정조(正祖)를 낳았다. 아버지와 오랜 갈등 끝에 만 27세의 젊은 나이로 7월의 한여름 땡볕 삼복더위에 쌀 담는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죽은 것, 즉 임오화변으로 유명하다. 영조가 늦은 나이(42살)에 얻은 아들로, 영조의 기대가 너무 커서, 감내하기 힘들 정도의 질책과 정신적 학대로 정신병을 얻어, 기행과 비행을 일삼다가 결국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았다.

어린 시절

사도세자는 1735년(영조 11년) 음력 1월 21일, 영조와 후궁 영빈 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영조는 장남인 효장세자를 7년 전에 잃고 다른 아들을 두지 못한 상태였고, 42세의 고령의 나이에 사도세자를 낳았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즉시 정실인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호적에 올린 후 '원자(元子)'로 정했고, 이듬해인 영조 12년(1736)에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원자를 왕세자로 정식 책봉한다. 영조는 어린 세자에게 기대가 너무 커서 세자가 읽을 책을 임금인 자신이 직접 밤을 새 가면서 필사했고, 성균관탕평비도 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해서 특별히 제작했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아주 어린 나이에도 유달리 매우 똑똑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태어난 지 4달 만에 스스로 기었고, 6달 만에 영조의 부름에 어느 정도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밥을 먹던 중에 아버지 영조가 말을 걸자, 입에 있는 밥을 전부 뱉고 답한 적도 있다고 한다. 왜 음식을 뱉었는지 영조가 묻자 어린 세자는 "소학(小學)에서 '부모가 부르실 때는 입에 있는 걸 뱉고 말하는 게 효(孝)'라고 배웠습니다"라고 답했다. 또한 7달 만에 동서남북을 구분할줄 알았고, 2살에 천자문을 배워 60자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영조는 이렇게 총명한 세자에게 인생에 있어 큰 화가 될 수도 있는 결정을 하는데,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세자를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와 떨어트려서 선의왕후 어씨가 살던 저승전(儲承殿)에 머물게 하고, 경종과 선의왕후 내외를 모시던 소론계 궁녀들에게 세자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저승전은 1730년에 선의왕후가 죽은 후 오랫동안 비어있었고, 근처에 희빈 장씨가 머물면서 인현왕후 민씨를 죽게 저주한 것으로 유명한 취선당(就善堂)이 있었다. 그런데 영조취선당을 소주방으로 정해 그곳에서 세자를 위한 음식을 만들게 했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는 자서전 한중록에서, 이것들이 남편을 망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라 말한다.

실제로 영빈 이씨는 출신이 미천해 한중록을 토대로 유추하면 6세에 궁궐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고, 숙종의 대전에서 일하다가 영조 즉위 후에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눈에 들어서 영조의 후궁이 되었다. 그러니 경종을 모시던 궁녀들에겐 영빈 이씨가 하찮게 보였을 수도 있다. 실제로도 세자를 직접 낳은 어머니(생모)는 영빈 이씨라도, 세자가 되면서 영조의 정실정성왕후 서씨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세자의 법적 어머니는 정성왕후 서씨다.


영조와의 관계

영조는 3살 때까지는 세자를 무척이나 아끼며 하는 일마다 칭찬했지만, 겨우 4살 때부터 구박하고 혼내기 시작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나머지 엄격하게만 키우다 보니, 세자는 이미 9살 때부터 부왕(영조)을 만나기를 무서워했다.

영조의 정서적 학대가 얼마나 심했냐하면, 정성왕후 서씨가 병환이 깊어지자 병수발을 직접 들러온 세자가 정성왕후가 피를 토한 그릇을 붙들고 통곡하던 중에도 영조가 온 것을 보자마자 울음이 뚝 그치고 겁에 질려 방 한구석에 웅크려 벌벌 떨었을 정도다. 아버지를 두려워한 사도세자는 아는 것도 우물쭈물해서 잘 대답하지 못했고, 이에 영조는 세자에게 더 실망해서 매우 거친 질책과 비난을 자주 했다.

1743년 9월경부터 세자는 "눈에 어지럼증(눈병)이 생겼다"고 스승들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스승들은 영조에게 "세자 저하를 먼저 치료받게 하고 휴식을 취하게 하십시오"라고 영조에게 말하지만, 영조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스승들이 재차 충고했더니 영조는 오히려 화를 내면서 "내가 세자에게 물어보니 책만 보면 어지럽다고 했다. 그러니 치료는 필요없다."고 말한다. 아들이 진짜로 병이 나서 치료해야 하는데 영조는 "세자가 공부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승들의 조언을 무시한 영조는 계속해서 공부하게 했고, 논어(論語)를 읽게 한 후에 세자에게 공부하라고 훈계하는 글을 내리는가 하면,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하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는 성격이 매우 달랐다. 한중록에서 두 사람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영조는 꼼꼼히 살피고 재빠른 성품인데, 세자는 덕성은 거룩해도 과묵하고 행동이 빠르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세자의 모든 일이 부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평소 묻는 말에도 즉시 대답하지 못해서 머뭇거리면서 대답했고 영조는 이를 매번 갑갑하게 여겼다고 한다.

임오화변

1762년, 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최극단에 달하게 되는데, 세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꿇어앉아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영조를 '아버님'이라고 강조해 "글도 잘 읽고 다 시키는 대로 잘 할 테니 이러지 마시라"는 아들의 절규와 신하들의 만류, 세손의 간청들에도 영조는 끝까지 아들을 용서하지 않고 자결을 명했다. 영조는 세자가 자결하려는 것도 신하들의 제지로 소용이 없자 격분해, 신하들과 세손을 강제로 끌어내고, 세자를 폐서인하며 쌀 담는 뒤주 속에 가두어 버렸고, 세자에게 물 한 모금도 주지 못하게 했다. 뒤주 속에 가둬진 세자는 결국 8일 만에 갈증과 굶주림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도세자와 관련된 미디어

드라마

  • 1979년 MBC 드라마 《안국동 아씨》
  •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
  • 1988년 KBS 드라마 《하늘아 하늘아》
  • 1998년 MBC 드라마 《대왕의 길》
  • 2007년 MBC 드라마 《이산》
  • 2007년 CGV 드라마 《정조암살 미스터리 8일》
  • 2011년 SBS 드라마 《무사 백동수》
  • 2014년 SBS 드라마 《비밀의 문》
  • 2015년 KBS 드라마스페셜 《붉은 달》
  • 2021년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영화

  • 1956년 <사도세자> - 안종화 감독
  • 1963년 <망부석> - 임권택 감독
  • 2015년 <사도> - 이준익 감독

작성자

이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