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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월의 시는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해 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요에 속한다" - ''김현'' <ref> 김윤식·김현 (초판 1973-08-30, 개정판 1996-09-10). 《한국문학사》. 서울: 민음사. 240쪽.</ref>
 
  "김소월의 시는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해 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요에 속한다" - ''김현'' <ref> 김윤식·김현 (초판 1973-08-30, 개정판 1996-09-10). 《한국문학사》. 서울: 민음사. 240쪽.</ref>
  
  김소월의 젊은 시절 시단에서 이른바 〈조선주의〉가 유행이었으나, 시인은 "조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조국의 산하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진달래라는 표상을 선택함으로써 겨레 감정에 호소한다. 그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구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하나만 가지고서도 그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시인이요 터주시인 - ''유종호'' <ref>유종호 (1995년 5월 25일). 《시란 무엇인가》. 서울: 민음사. 28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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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월의 젊은 시절 시단에서 이른바 〈조선주의〉가 유행이었으나, 시인은 조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조국의 산하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진달래라는 표상을 선택함으로써 겨레 감정에 호소한다. 그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구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하나만 가지고서도 그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시인이요 터주시인" - ''유종호'' <ref>유종호 (1995년 5월 25일). 《시란 무엇인가》. 서울: 민음사. 281쪽.</ref>
  
 
=='''관계도'''==
 
=='''관계도'''==

2022년 6월 7일 (화) 13:18 판

김소월 개요

김소월(1902년 9월 7일 ~ 1934년 12월 24일)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서구 문학의 풍조가 범람하던 시기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한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대표작품은 「진달래꽃」, 「초혼」, 「접동새」, 「먼 후일」 등이 있으며, 그의 시는 노래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다.

생애

  •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왕인동 외가에서 9월 7일 출생.[1][2]
  • 1905년 조국이 식민지화의 길로 치닫게 됨. 이때 즈음 유학/한문에 소양이 높은 할아버지의 훈도 밑에서 구학문을 배우기 시작. 어린 소월은 수많은 민담·민화 등을 들려주었던 숙모 ‘계희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됨.
  • 1909년 남산보통학교가 설립되자, 머리를 깎고 신학문 배우기 시작.
  • 1915년 남산보통학교 졸업. 5월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안서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음. 이때 소월 시의 원천이 된 한시·민요·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했던 것으로 추정됨.
  • 1916년 오산학교중학부에 입학하여 시를 짓기 시작하고, 「먼후일」을 썼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 1920년 김소월은 김억의 응원으로 1920년, 그의 나이 18세에 ‘창조’ 5호에 시를 실으며 등단하게 됨.
  • 1922-1923년 배재학당 시절, 시인으로서 가장 활발히 활동함. 1922년 한 해에만 50여편의 시를 발표, 이 시기 소설가인 나도향과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5월 『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함.
  • 1934년 12월 23일 평안북도 구성군 자택에서 사망. 죽음의 원인은 마약중독으로 추정됨.

가족

김성도

장경숙

계희영

홍단실

김구생

김구원

김준호

김은호

김정호

김낙호

김은숙

김영돈

가족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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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작품 세계

작품 경향

  1. 한(恨)

소월의 작품 세계는 '한의 정서' 에서 비롯된다. 그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민족적 배경과 순탄하지 않았던 가정사가 소월 시에 나타나는 '한의 정서'의 기반이 되었다 소월의『먼 후일』에서는 임을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마음을 '잊었노라'라는 반어적 표현으로 반복함으로써 한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진달래꽃」에서는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진심을 대신하여 임을 보내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 말한다. 그립고 슬픈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감정이 '한'으로 이어져 독자의 가슴에 사무치는 것이다. 한 맺혀 응어리진 마음은 동시에 슬픔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소월의 또다른 시 「길」에서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나그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시대, 나라를 잃고 몸과 마음 둘 곳 하나 없었던 처지를 드러낸다.「길」에서의 '한'은 억압과 탄압의 시대 를 살았던 사람들의 애환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소월 시에서 나타나는 '한의 정서'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임과의 이별 상황에서 느끼게 되는 '한'과 조국을 잃은 비애로부터 표출되는 '한'이다. 하지만 이 두 갈래의 감정을 명확히 구분 짓기는 어렵다. '한'에는 하나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원망·안타까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얽혀있다. 일제의 탄압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좋지 못했던 소월의 가정사를 고려한다면, 소월 시에 등장하는 '한'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토해낸 울분이라고 할 수 있다.[3]

    1. 여성적 정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와 「님에게」라는 시를 보면, 여성이 임을 그리워하며 시를 작성한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대부분의 시적 화자를 당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으로 설정했다. 「초혼」처럼 남성적 절규를 표현한 작품도 있으나 극히 예외적이고, 그의 시 대부분은 상처 입은 여성의 애절한 마음을 그려내고 있다. 운명론적 인생관을 가진 수동적 여성이 자기희생적인 태도로 시를 전개하여 민요적 특성을 강화했고, 애절한 마음을 섬세하게 형상화하여 서정적 완결성을 높였다. 작품 초기에는 개인의 아픔을 드러내기 위한 소재로 여성적 정조를 활용하는 경향이 보인다. 3·1운동 실패 이후 고문당하는 동료들과 와해하는 오산학교를 보며 엄청난 상실감을 느꼈고, 이 감정을 사랑에 대한 서러움(정념)으로 비유하여 통탄한 감정을 표출했다. 이렇게 주체를 잃고 방황하는 현실에서 '님', '그 여자', '그대' 등의 소재를 활용하여 존재 방안을 모색해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반면 작품 후반부로 가면 식민지의 안타까운 현실에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내며 독자와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다.「비오는 날」, 「가혹한 인생」, 「봄바람」 등의 시에서 일제강점기에 소외된 사람들의 처지를 직시하며 연대를 추구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김소월의 여성적 정조 활용은 일제 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연애 담론’으로 우회해서 표현하여 일제의 검열을 피한한 것이라 해석되기도 한다.[4]

문학사적 가치

  • 대표적인 민요시인

식민지 상황 속에서 지배 논리에 동화되지 않고 민족주의 이념을 '민요'의 형태로 승화했고, 이를 기반으로 '민요적 근대시'라는 형식을 창조해냈다. 그는 민요시를 쓰면서 민족 고유의 전통을 모색하고 계승하려는 정신사적 의지를 드러냈다.

전통적 정서와 율격의 기반 위에서 개인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방식으로 애환을 표현였다. 단순히 민요적 특성을 차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인만의 개성이 담긴 자유시로 변형시켰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근대 자유시 형식 구축

김소월은 시 전반에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풀어내 서정시의 기틀을 다지기도 하였다. 그는 구시대의 문화적 규범이 붕괴되고 서구의 근대 자유시가 무분별하게 쇄도하던 문학적 혼란기에 현대시를 한국의 전통과 접맥시켜 문화적 주체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의 민족주의와 서구의 낭만주의라는 두 이념을 조화롭게 융화하여 문학 속에 반영한 것이다.

선례가 없던 장르에서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며 새롭게 도전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실험적인 시는 현재까지도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많은 콘텐츠로 재생산되고 있다.

평가

"우리 현대시사의 한 표준이며 역사" - 김용직 [5]
"김소월의 시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향토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 … 한 마디로 전통적인 시인" - 조연현 [6]
"우리 민족의 문학적 생리에 배겨 있는 민중적·민요적 리듬을 가장 적절하게 건드려 준 시인" - 조병춘 [7]
"김소월의 시는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해 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요에 속한다" - 김현 [8]
"김소월의 젊은 시절 시단에서 이른바 〈조선주의〉가 유행이었으나, 시인은 조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조국의 산하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진달래라는 표상을 선택함으로써 겨레 감정에 호소한다. 그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구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하나만 가지고서도 그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시인이요 터주시인" - 유종호 [9]

관계도

네트워크 그래프

RDF

2차 창작

참고문헌

  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소월(金素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535
  2. 편집부, 2015, 김소월의 문학과 생애, 문예운동사, 문예운동 2015년 여름 호, p20-27.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340644
  3. 홍용희. (2019). ‘근대화된 민요시’와 세계조선시인의 탄생 - 김소월의 시 세계를 중심으로. 한국시학연구, (60), 343-369.
  4. 박군석. (2018). 김소월의 시에 나타난 내면의 타자, ‘그 여자’의 현현. 한국시학연구, (56), 9-53.
  5. 김용직 (1997년 9월 30일). 《한국현대문학의 사적 탐색》.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9쪽.
  6. 조연현 (1969년 9월 5일). 《한국현대문학사》. 서울: 성문각. 438쪽.
  7. 조병춘, 〈한국 현대시의 전개양상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79) 113쪽.
  8. 김윤식·김현 (초판 1973-08-30, 개정판 1996-09-10). 《한국문학사》. 서울: 민음사. 240쪽.
  9. 유종호 (1995년 5월 25일). 《시란 무엇인가》. 서울: 민음사. 2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