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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초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대표적인 문인. 일제 말기에 한 친일 행각 때문에 한국 근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문학 초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대표적인 문인. 일제 말기에 한 친일 행각 때문에 한국 근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2019년 5월 29일 (수) 23:50 판


이광수(李光洙)

개요

요약

문학 초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대표적인 문인. 일제 말기에 한 친일 행각 때문에 한국 근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

연보

  • 1892

2월 초(음력)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리 940번지 돌고지에서 전주 이씨 문중 5대 장손으로 태어남

  • 1894

가세가 기울어 극도의 생활고를 겪음 아명은 보경(寶鏡)

  • 1896

한글과 천자문 깨침

  • 1897

친동생 태어남. 외조모 별세. 가산이 더 기울음(팔대가서의 칠서를 파는 등)

  • 1899

동리의 글방에서 대학, 중론, 논어 등 읽음 백일장에서 장원하는 등 신동으로 일컬어짐

  • 1900

정양동 자성산 기슭으로 다시 집 줄여 옮기고 1902년까지 이 곳에서 삶. 서당에서 계속 한학 공부. 둘째 여동생 태어남

  • 1902

부모의 의사로 향리 김씨 집에 청혼하였으나 경제적 이유로 거절당함 부와 모가 콜레라로 별세하게 되며(8일차) 3남매가 고아가 됨 큰누이는 조부에게 의탁, 작은누이는 남의 집 민며느리감이 됨. 외가와 재당숙 집을 전전 기식하며 방랑생활 삼종 누이 영향을 받아 '사씨남정기', '창선감의록', '구운몽' 등을 빌려 봄 이 무렵 이야기를 하나 창작하여 삼종들에게 보임

  • 1903

120냥을 변통하여 1년 만의 양친 무덤을 면례함. 남의 집에 보내진 둘째 여동생 이질로 사망 동학대접주 승이달의 인도로 동학당에 거둬짐 [[동학]에 입도, 박찬명 대령 집에 기숙, 동경과 서울에서 오는 문서를 베껴 배포하는 일을 맡음

  • 1904

일본의 동학 탄압에 따라 현상 체포령이 내려 향리를 떠나 피신. 정주읍 연후루에서 진보회를 조직하는 데 가담(8월 29일) 조부에게 상경할 뜻을 말하고 진남포에서 인천을 거쳐 서울에 이름. 상경 동안 서조모 별세, 다시 고향으로 돌아감

  • 1905

일진회와 접촉하는 한편 개화사상에 눈을 뜸. 진남포에서 화륜선 편으로 인천을 거쳐 상경하는 길로 삭발 일진회에서 세운 광무학교 전신인 소공동학교의 일여교사로 채용됨 광무학교가 설립되자 학생으로 공부 일어교사를 통해 일어를 실습하며 산술을 배우다 일진회의 유학생 9명 중에 선발됨. 손병희를 일본에서 봄. 문장보국 결심

  • 1906

3월 타이세이중학교 1학년에 입학. 홍명희와 동급으로 한 하숙에 동거. 11월 일진회의 내분으로 학비가 중단되어 일단 귀국. 조부의 생계가 날로 곤궁함으로 향리를 전전.

  • 1907

외가에 머무는 동안 조카의 친구에게 처음으로 이성에 대한 정을 느낌. 2월 유학비를 학부에서 해결해 주어 다시 도일. 3월 안창호가 미국으로부터 귀국 도중 동경에서 행한 애국연설을 듣고 감명 받음 예수교를 접하고 청교도적 생활을 흠앙. 호암 문일평 등과 교유. 홍명희, 문일평 등과 '소년회'를 조직하고 《동람지》 소년을 발행하여 시와 논설 등 발표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3학년 B조에 보결시험을 치르고 편입.

  • 1908

톨스토이에 심취. 무저항주의에 공감 홍명희의 소개로 육당 최남선을 알게 됨. 7월 동경 유학생 야구단과 함께 귀국하여 여낙 면학회의 사법강습소에서 최광옥 등과 강의. 홍명희의 소개로 서울에서 정인보와 알게 됨.

  • 1909

홍명희의 영향으로 바이런의 '카인', '해적', '돈판' 등을 읽으며 자연주의 문예사조에 휩쓸림. 김우영과 사귐. 최초의 신체시 '우리 영웅'을 《소년지》에 발표. 일본어 소설 '사랑인가' 발표 장편 '노예', '방랑' 등을 집필하는 등 창작에 집념. 5학년 급우 친목회에서 '우감'이란 제목으로 연설. 메이지학회 동창회보에 발표한 작품이 일본 잡지 부의 일본에 올라가며 유학생계에서 문명이 높아짐. 아호를 고주로 자처함. 정육론 집필, 황성신문 발표

  • 1910

여행기 '여행의 잡감'을 발표 《소년지》에 '어린희생'을 연재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5학년을 졸업하고 제일고에 합격하여 입학준비 중 조부가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 귀국. 향리의 오산학교 교주 남강 이승훈의 초청으로 동교의 교원이 됨.(김소월 등의 담임 맡기도) 오산학교 교가 직접 작사 조부 별세 향리 지인의 중매로 6월 백혜순과 정혼. 집을 용동으로 옮기고 야학을 열며 남강의 매상촌운동의 선봉에 섬. 톨스토이 서거에 오산학생과 더불어 추도회를 엶. 먕명 도중 오산에 들른 단재 신채호와 알게 됨. '나의 자각한 인생' 발표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 발표

  • 1911

105인 사건으로 오산학교 교주 남강이 구속, 학감으로 취임하고 오산학교의 실질적 책임 짐. 예수교회에 운영을 의지하며 선교사 로버트 목사가 교장으로 취임. 하기 방학에 상경하여 최남선 집에 유하며 시국을 담론. 학제개혁안을 주장하여 오산학교 개편. 남강의 뒤를 이어 용동회장의 일을 봄. 비밀 독립운동 단체 조선학회 조직

  • 1913

대구형무소로 남강을 면회하고 교직의 난의를 표명(로버트 목사에 의해 배척) 안동현에서 위당 정인보를 만나 그의 권고와 더불어 상해 행 결심 상해 법조계 백미부락에서 홍명희, 문일평, 조용은, 송상순과 동거. 미국의 '검둥이의 설움'을 한글로 처음 번역하여 신문관에 간행. 《새별》에 '말 듣거라' 발표

  • 1914

해삼위를 떠나 목릉에 도착, 청계 안정근의 안내로 이갑을 만남. 치타에서 열린 시베리아 국민회 대의회에서 정교보의 주필로 임명. 1차 세계대전 발발로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잠시 다시 교편 잡음. 소년잡지 《새별》 편집에 참여. 최남선 주재로 창간된 《청춘》에 참여, 단편소설과 글과 칼럼 등 발표

  • 1915

장남 낳음. 인총 김성수 후원으로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편입.

  • 1916

와세다대학 고등예과 수료,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매일신보의 요청으로 '동경잡신' 씀. 10월 심우섭 소개로 경성일보, 매일신보 사장을 만남. 조선학회 열례회에서 우리 민족에 관한 학술발표 함. 계몽적 논설을 매일신보에 연재. 평론 ‘문학이란 하오’ 발표

  • 1917

철학과에서 특대생으로 진급. 유학생회에서 허영숙과 알게 됨. 매일신보 연재 ‘무정’이 126회로 끝남.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 임원 개선에서 최승만, 전영택 등과 함께 편집부원으로 뽑혀 학지광 편집위원이 됨. 두 번째 장편소설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 '어린 벗에게',

  • 1918

폐결핵. 《청춘》지에 '소년의 비애', '윤광호', '방황' 등 탈고 및 발표 논문 '의지론적 진화론' 당국에 압수. 9월 매일신보에 '신생활론'을 연재하여 물의를 일으킴. 파리평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에 북경에 있다가 급거 귀국. 3.1 운동의 선봉이 되게 함. 재일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 백혜순과 이혼 논설 '자녀중심론'

  • 1919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본국에 정하여 국내외에서 동시 궐기할 것 말함. 신한청년당 조직에 가담. 3.1 독립선언서의 제1보를 기사화하여 보토케 함. 망국청년들이 주관한 '우리 소식'에 논설을 기고. 소장파의 중심이 되어 임시의정원 조직에 협력. 임시의정원 평안도대표로 선출됨.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주임의 일을 맡음. 임시정부 공부국장과 주요한의 협력을 얻어 주간《독립》 발행,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 겸임. 희곡 '순교자' 지음. 오산학교 제자를 소재로 ‘H군에게’를 집필. 안중근 의사 부인 초청연에 참석. 흥사단의 임시반장으로 임명. 사료편집위원회 해산, 독립신문의 운영난으로 민족운동의 장래와 미래에 대해 번민. '너는 청춘이다'와 같은 시 그리고 평론을 집필하여 《창조》에 보냄.

  • 1920

흥사단에 가입

  • 1921

독립운동 침체로 절망. 단신으로 상해를 떠나 밤차로 압록강을 건넜으나 체포되어 신의주로 연행되었다가 서울로 송치, 불기소석방. 고읍 역에서 염상섭과 알게 됨. 변절자라는 오해로 일시 비난의 적 됨. 이혼 후 허영숙과 재혼.. 인생관을 모색하는 서간체 감상문 집필. 《개벽사》의 청으로 '소년에게'를 연재하며 출판법 위반 혐의로 종로서에 연행. '민족개조론' 집필. '가실' 집필

  • 1922

《백조지》 필진 한 사람으로 참여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문 석전 박한영 찾아가 서예와 한시를 배우고 불교전문강원에도 출입. 경신학교 교사로 영어를 가르침 수양동맹회 조직 조선 총독 사이코 마코토와 면담, 아베 미쓰이에와 접촉,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 얼마 후 퇴사. 흥사단 원동위원부 창립 주관. 주요한과 함께 안창호의 연락을 받고 동우구락부, 수양동맹회 발족 지시. 단편 '할멈' 집필 서해 최학송과 서신 왕래

  • 1923

다시 동아일보에 입사 후 사회부 촉탁기자 됨. '어둠의 힘' 번역 간행 [[안창호] 모델 장편 소설 '선도자' 동아일보에 연재하다 연재중단. '법화경'을 한글로 해석 기행문 차향

  • 1924

동아일보 연재사설 '민족적 경륜'이 물의를 일으켜 퇴사. 김성수와 송진우의 배려로 다시 복귀, '허생전'과 '재생' 연재 여기자 최은희 발탁 조선문단 창립발기인으로 창립 주재. '인생의 향기', '혈서' 집필

  • 1925

동아일보에 '춘향전' 연재. 시 '세 가지 맹세' 지음 '재생' 신병으로 중단 '가을의 들' 집필.

  •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 동아일보 편집국장 취임 '마의태자' 연재 종합교양지 《동광》의 창간 도움 '젊은 꿈' 《박문서관》에서 간행 '인물론'이 검열로 삭제됨

  • 1927

편집국장직 사임, 편집고문으로 전임.

  • 1929

'단종애사' 집필. '아프던 이야기' 발표 '아들의 원수' 연재

  • 1930

자작 영화소설 '정의는 이긴다' 소개 '사랑의 다각형' 연재 끝냄 '삼봉이네집' 연재 '브나로드 운동' 시작

  • 1931

'이순신' 연재 미스코리아 대회 심사위원 충무공 유적보존회 조직에 참여

  • 1932

'' 연재

  • 1933

조선일보사 부사장 취임 장편 '유정' 연재

  • 1934

맏아들 죽음. '그여자의 일생' '일서일신' 연재 중단.

  • 1936

수필 '오동'

  • 1937

동우회사건 피의자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신병 재발로 병감 옮겨짐.

  • 1938

시조 '어린 아들', 시 '내 죄', '버들강아지' 단편 '무명'과 전작장편 '사랑의 집필'에 착수.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하여 강연

  • 1939년

'무명' 《문장》에 발표 '세조대왕' 집필에 착수 '꿈' 집필 '무정'이 영화화되어 상영 '이광수단편선' 간행 조선문인협회 회장 선출, 전선 병사 위문대, 위문문 보내기 행사 주도. 북지황군 위문 사절 후보 선거 실행위원 《삼천리》에 '문단사절의 의의'발표 조선총독부 도서과가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

  • 1940

가야마 미쓰로 창씨개명 '내선일체'와 '조선문학' 발표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 게재 황민화운동 지지 '의무교육과 우리의 각오'

  • 1941

'그들의 사랑' 연재 '봄의 노래' 연재 '원효대'’ 집필 착수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애국일의 노래' 방송 일문 산문집 '동포에 부침' 발표, 간행 시 '가끔씩 부른 노래' 국민연극연구소에서 예술개론 강의 임전대책협의회 발기인으로 참여 '애국채권' 판매

  • 1942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에서 시 낭독 '대동아 일주년 맞는 나의 결의' 발표 징병제 연설회에서 '획기적 대선물' 제목으로 연설 '징병과 여성' 게재 대동아문학자대회 참가

  • 1943

'폐하의 성업'에 발표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 국민개병가 현상모집 심사위원으로 활동 조선문인보국회 결성, 이사 선출 이광수 작사 노래 '희망의 아침' 방송

  • 1945

'모든 것을 바치리' 등 103편의 시, 논설 등 매일신보에 기고 '조선의 학도여', '그들의 사랑', '성전 3주년' 발표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 위원

  • 1947

'도산 안창호' 출간 '꿈' 간행 '백범일지' 작업 참여

  • 1948

'나의 고백' 발표

  • 1949

'반민법'에 육당과 함께 서대문형무소 수감.

  • 1950

'사랑의 동명왕', 서울 유작 '운명' 집필. 서울대문리대 불문과에 입학 효자동 집에 공산군에 의해 차압됨. 납북됨. 폐결핵 악화로 사망

  • 일제강점기소설가. 소설가 외에도 시인, 동아일보독립신문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호는 '춘원(春園)'. 일본식 이름은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1905년 8월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뽑혀 이듬해 일본에 있는 메이지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하게 된다. 이광수는 망명 도중 오산에서 신채호와 만나게 된다. 1911년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자 학감으로 취임해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된다. 그런데 기독교계인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생물 진화론톨스토이를 가르친 것이 빌미가 되어 교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와세대 대학에서 공부하며 유학생 잡지 『학지광』을 편집했다. 1918년 북경에서 조선청년독립단 조직에 가담했다. 이후 흥사단에도 가입하였다. 1921년 귀국 이후 국내에서 「허생전」, 「재생」, 「마의 태자」, 「단종애사」, 「이순신」, 「흙」, 「그 여자의 일생」 등의 소설과 「문사와 수양」, 「민족개조론」, 「민족적 경륜」 등의 논설을 써서 발표했다. 1939년에는 친일 문학인들의 모임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이후 줄곧 친일 연설을 하며 전국을 순회했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로 지목되어 곤란을 겪었고, 1949년 반민법에 걸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6·25전쟁 중인 1950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7월 12일 납북된다. 이후 강계에서 30여km 떨어진 산악지대의 강추위 속에서 심한 동상에 걸리고, 건강이 더 악화된다. 이후 북한 만포의 한 병원에 있다가 1950년 10월 25일 생을 마감한다.

학력

  1. 광무학교
  2. 일본 메이지학원
  3. 일본 와세다대학교 철학과
  4. 일본 경성제국대학 법학과

경력

  1. 1910년 ~ 1913년 정주 오산학교의 학감
  2.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
  3. 수양동맹회를 발기
  4. 1923년 ~ 동아일보 입사
  5. 1924년 ~ 조선문단 창간 주재
  6. 1926년 ~ 기관지 동광 창간
  7. 1933년 ~ 1934년 조선일보 부사장

작품

  1. 무정
  2. 유정
  3. 나의 고백

독립운동과 친일활동

RDF 및 온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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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이광수

이광수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안애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