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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0일 (화) 22:31 판
목차
개요
1902년 출생 1950년 사망인 일제강점기 시기의 작가이다.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이다. 대표작으로는 탁류, 인형의 집을 나와서, 금의 정열, 태평천하, 어머니, 아름다운 새벽, 치숙, 패배자의 무덤, 미스터 방, 레디메이드 인생, 제향날 이 있다.
생애
소개
채만식은 1902년에 ‘전라북도 임피군 군내면 동상리(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부농인 아버지 ‘채규섭(蔡奎燮)’과 어머니 ‘조우섭(趙又燮)’ 사이에서 5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 후, 유년기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학습했다. 이후, ‘임피보통학교(현 임피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918년에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로 상경한 다음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922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그해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부속 제일 와세다 고등학원’에 입학한 후 예과 과정을 밟았으나, 1년 만인 1923년에 중퇴했다. 그 뒤 ‘조선일보(朝鮮日報)’사와 ‘동아일보(東亞日報)’사, 그리고 ‘개벽(開闢)’사에서 기자로 전전하는 삶을 살았다. 이때, 잡지 ‘별건곤(別乾坤)’과 ‘혜성(彗星)’, 그리고 ‘제일선(第一線)’ 등의 편집을 맡았다.
그 후, 채만식은 1924년에 ‘세길로’라는 단편 작품을 ‘조선문단(朝鮮文壇)’이라는 문예잡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총 290여 편에 이르는 장편 및 단편소설과 희곡과 평론, 그리고 수필을 집필했다. 특히 그는 1930년대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그의 대표작이라고 부를 만한 작품들이 이 시기에 많이 발표되었다. 그 예시로, 장편으로는 ‘탁류(濁流, 1937~1938)’, ‘인형의 집을 나와서(1933)’, ‘금(金)의 정열(1939)’,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 1938)’, ‘어머니(1943)’, ‘아름다운 새벽(1942)’, 그리고 ‘여인전기(1944)’ 등이 있다. 또한, 단편으로는 ‘치숙(痴叔, 1938)’, ‘패배자의 무덤(1939)’, ‘미스터 방(方)(1946)’, ‘레디메이드 인생(1934)’, 그리고 ‘맹순사(1946)’ 등을 들 수 있다. 추가로, 희곡으로는 ‘당랑(螳螂)의 전설(1940)’과 ‘제향날(1937)’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채만식은 1936년 이후에는 더 이상 직장을 가지지 않고 작품 활동을 위주로 생활했다.
그러다가, 1942년에 채만식은 친일문화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가 주관한 ‘순국영령방문행사’에 참석했다. 이후, 월간잡지인 ‘춘추(春秋)’ 등에 발표한 산문 및 1943년부터 1944년까지 ‘매일신보{每日申(新)報}’ 등에 발표한 산문과 소설을 통해 ‘일제(일본 제국, 大日本帝国)’가 미국을 상대로 일으킨 ‘태평양 전쟁(太平洋 戰爭)’을 위한 지원병을 선전 및 선동하면서 친일적인 행보를 걸었다. 이외에도,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이 주관한 ‘예술부문 관계자 연성회’, ‘보도특별정신대’, 그리고 ‘생산지 증산 위문 파견’에 참여하는 등 친일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후 1945년에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으로 낙향했다가 다음 해에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로 이사했고, 1950년에 결국 그곳에서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학력
학교 | 상태 |
---|---|
임피초등학교 | 졸업 |
중앙고등학교 | 졸업 |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 와세다 고등학원 | 중퇴 |
출생지 및 사망지
출생지
사망지
작품 목록
문학사적 가치
관련 항목(온톨로지)
참고 문헌
- “채만식”, <NAVER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22.04.11.,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62837&cid=46645&categoryId=46645.
- 이덕화, 「채만식의 문학의식과 글쓰기 = The Literature Thougut and Writing of Chae Man Sik」, 『論文集(PYONGTAEK REVIEW)』, Vol.- No.-, 평택대학교(PYONGTAEK UNIVERSITY), 2002, 563-5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