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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고야는 자신의 시대를 강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18세기로 나아가는 데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역사적 특성을 끊임없이 적용했다. 고야는 한 시기가 종말에 이르렀으며, 다른 시기가 갈등의 싹을 지닌 채 미지의 사건들을 가져오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과 사물을 특정짓는 구체적 문명 즉, 정치적 질서와 사회적인 질서라는 두 세계 사이의 변환기를 해석한 '전환기'의 예술가였다. 유럽의 정치적 의식이 [[군주제]]로부터 [[국가체제]]로 옮겨가는 데 직면하자, 예술은 부르주아 사회의 이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예전의 궁정양식을 버린다. 이는 고야의 직관 속에 자리 잡은 풍부한 창조성을 분출시킨다. 이는 미술사의 통상적인 전개양상을 뒤엎는 파격적 사건으로, 모든 것은 유럽의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로코코 양식이 백과사전파에게 길을 내준 시기와 일치한다. 백과사전파는 [[계몽주의]]의 [[인본주의]]를 장착한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사상으로 이성과 감성,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똑같이 양분을 제공했다.
 
실제로 고야는 자신의 시대를 강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18세기로 나아가는 데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역사적 특성을 끊임없이 적용했다. 고야는 한 시기가 종말에 이르렀으며, 다른 시기가 갈등의 싹을 지닌 채 미지의 사건들을 가져오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과 사물을 특정짓는 구체적 문명 즉, 정치적 질서와 사회적인 질서라는 두 세계 사이의 변환기를 해석한 '전환기'의 예술가였다. 유럽의 정치적 의식이 [[군주제]]로부터 [[국가체제]]로 옮겨가는 데 직면하자, 예술은 부르주아 사회의 이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예전의 궁정양식을 버린다. 이는 고야의 직관 속에 자리 잡은 풍부한 창조성을 분출시킨다. 이는 미술사의 통상적인 전개양상을 뒤엎는 파격적 사건으로, 모든 것은 유럽의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로코코 양식이 백과사전파에게 길을 내준 시기와 일치한다. 백과사전파는 [[계몽주의]]의 [[인본주의]]를 장착한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사상으로 이성과 감성,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똑같이 양분을 제공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시대]]로 이행되는 시기에, 이 아라곤의 화가가 처했던 한 인간과 [[예술가]]로서의 운명은 당대의 이념적 정신적 미학적 질서에 반응하면서, 시대가 잉태한 사회적 악에 대하여 비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의 여정 속에서 지적 호기심을 버리지 않은 채, 이 강렬한 열망은 고야의 예술 속에 변화의 기반으로 남게 된다. 그가 다룬 그림의 소재는 사상적 측면에서 모든 범주를 다룬다. 거기서 우리는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것, 궁정의 초상과 풍속, [[에로티시즘]]과 전쟁, 일상생활과 정치적 풍자를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다룬 가공할 만한 주제들 속에서 악몽과 마법, 광기라는 '저 너머'의 세계 역시 보게 된다. 이러한 모티브들을 회화와 시의 절대성에 도달하려는 견자로서의 능력을 통해 탐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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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시대]]로 이행되는 시기에, 이 아라곤의 화가가 처했던 한 인간과 [[예술가]]로서의 운명은 당대의 이념적 정신적 미학적 질서에 반응하면서, 시대가 잉태한 사회적 악에 대하여 비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의 여정 속에서 지적 호기심을 버리지 않은 채, 이 강렬한 열망은 고야의 예술 속에 변화의 기반으로 남게 된다. 그가 다룬 그림의 소재는 사상적 측면에서 모든 범주를 다룬다. 거기서 우리는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것, 궁정의 초상과 풍속, [[에로티시즘]]과 전쟁, 일상생활과 정치적 풍자를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다룬 가공할 만한 주제들 속에서 악몽과 마법, 광기라는 '저 너머'의 세계 역시 보게 된다. 이러한 모티브들은 회화와 시의 절대성에 도달하려는 견자로서의 능력을 통해 탐구되었다.
  
 
===대표 작품===
 
===대표 작품===

2019년 6월 18일 (화) 19:45 판


개요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스페인어: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년 5월 30일 - 1828년 4월 16일)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고야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 스페인 예술가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며, 중세시대 마지막 거장이자 근대의 시작으로 불리기도 한다.

생애[1]

아라곤, 로마 (1760-1774)[2]

고야는 고향 아라곤의 화가 호세 루산 밑에서 화가로서의 수련을 쌓았다. 유명한 판화 작품을 모사하도록 했던 루산의 교육 방식으로 인해 고야는 일찍부터 판화에 대한 열정을 싹틔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마드리드에서 열린 경연대회에서 두 차례에 결쳐 낙선한 후 1770년 고야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로마에서 고대 조각품에 매료되어 중요한 작품을 데생하고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고, 이러한 과정은 훗날의 작품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 여행이 끝나갈 무렵 고야는 자신감과 독자적 감각을 얻게 되었다.

마드리드 (1775-1786)[3]

1775년 1월 마드리드로 이주한 고야는 태피스트리의 밑그림 도안으로 궁정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소소한 일상생활을 묘사하는 새로운 사실주의적 경향이 일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고야도 일상적인 주제를 묘사하는 데 몰두했다. 태피스트리 밑그림과 벨라스케스의 유화를 모사한 에칭 연작으로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1780년 마침내 아카데미 회원의 지위를 얻었고, 개인 후원자와 그들의 초상화를 통해 마드리드에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왕의 전속화가 (1786-1808)[4]

1786년 카를로스 3세의 전속화가로 임명된 고야는 이후 전형적인 18세기식 자세를 취한 궁정관리들과 귀족들을 그린 초기 초상화를 제작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때부터 서서히 인생의 본질을 철저히 탐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1790년대에 이르자 주제의 변화는 더욱 뚜렷해졌다. 1792년에 병을 앓고 청력을 상실하게 된 뒤 그의 예술은 새로운 특성을 띠었는데, 예리한 관찰력과 비판력으로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했으며, 이는 1799년 출간된 판화집 «변덕»으로 이어졌다.

나폴레옹 치하의 궁정화가 (1808-1814)[5]

고야는 나폴레옹 치하에서 궁정화가의 신분을 유지하며 공식 초상화를 그리는 한편, 독립전쟁에 대한 기록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때 제작한 «전쟁의 참화»라는 동판화 연작은 침략과 전쟁의 공포 및 그 비참한 결과를 생생히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처절한 전쟁의 참상을 기록형식의 사실주의가 아니라 선묘와 애쿼틴트를 써서 극적으로 구성했으며, 빈틈없는 세부묘사로 실물 같은 생생한 효과를 창조해냈다.

페르난도 7세의 궁정화가 (1814-1824)[6]

전쟁이 끝난 뒤 복귀된 부르봉 왕조의 궁정에서도 고야는 여전히 수석화가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 치하의 폭정에 직면하여 우울하고 풍자적이고 섬뜩한 소재의 작품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린 종교화 몇 점은 초기의 어떤 작품보다도 진지한 신앙을 보여준다. 그러나 '귀머거리의 집'이라고 불린 저택의 벽을 장식한 수수께끼 같은 '검은 그림들'과 비슷한 시기에 만든 동판화 연작 «어리석음»은 표현주의 기법으로 악몽 같은 환상을 보여주며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절망을 반영했다.

프랑스 (1824-1828)[7]

1824년 자유주의 정부를 세우려는 기도가 실패로 끝난 뒤 페르난도 7세의 폭정이 다시 시작되자, 고야는 프랑스로 떠난다. 그는 잠시 파리에 머물다가 보르도를 망명지로 선택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말년의 작품들은 그의 끊임없는 실험 정신과 독창성을 보여준다.

작품

역사적 의미[8]

역사적으로 볼 때, 프란시스코 고야의 천재성은 강렬한 갈등과 이중적 함의가 담긴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양식을 통해 창작기간 내내 지속되었던 특출한 선구자로서의 면모ー인상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가 그의 영향을 받았다ー에서 잘 드러난다.

연구자들이 고야를 떠올릴 때 가장 강조하는 특성은 근대성이다. 이는 그의 전 작품에 걸쳐 지속되었던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이는 장래의 선택에 대한 가정 없이 계속된다. 게다가 매 시기 높은 결과를 얻음으로써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위대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고야는 끊임없는 모험 속에서 놀라운 독창성을 창조하고 구축했다. 미술사상 그보다 억누를 수 없는 열정과 때로는 실험적이고 때로는 극단적인 관능성을 보여준 예술가는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로운 창조자', 고독한 천재로서의 고야를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고야는 많은 예술가들의 삶이 이야기 될 때 그랬던 것처럼 몰이해되거나 저주받은 경우도 아니었으며, 벼락출세를 이룬 자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1786년 어릴 적 친구인 마르틴 사파테르에게 쓴 편지에서 그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솔직히 얘기해보세.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라면, 최대한 많은 이익을 누리려고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이러한 현실적 사고는 정확히 어떤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이 지속되는 어느 역사적 순간의 증인이자 주인공이어야 하므로, 고야의 제일 목표를 충족시키는 사고는 곧 근대성에 대한 목마름이었던 것이다. 그와 더불어 냉소주의도 그의 일부를 차지하게 된다.

실제로 고야는 자신의 시대를 강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18세기로 나아가는 데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역사적 특성을 끊임없이 적용했다. 고야는 한 시기가 종말에 이르렀으며, 다른 시기가 갈등의 싹을 지닌 채 미지의 사건들을 가져오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과 사물을 특정짓는 구체적 문명 즉, 정치적 질서와 사회적인 질서라는 두 세계 사이의 변환기를 해석한 '전환기'의 예술가였다. 유럽의 정치적 의식이 군주제로부터 국가체제로 옮겨가는 데 직면하자, 예술은 부르주아 사회의 이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예전의 궁정양식을 버린다. 이는 고야의 직관 속에 자리 잡은 풍부한 창조성을 분출시킨다. 이는 미술사의 통상적인 전개양상을 뒤엎는 파격적 사건으로, 모든 것은 유럽의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로코코 양식이 백과사전파에게 길을 내준 시기와 일치한다. 백과사전파는 계몽주의인본주의를 장착한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사상으로 이성과 감성,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똑같이 양분을 제공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시대로 이행되는 시기에, 이 아라곤의 화가가 처했던 한 인간과 예술가로서의 운명은 당대의 이념적 정신적 미학적 질서에 반응하면서, 시대가 잉태한 사회적 악에 대하여 비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의 여정 속에서 지적 호기심을 버리지 않은 채, 이 강렬한 열망은 고야의 예술 속에 변화의 기반으로 남게 된다. 그가 다룬 그림의 소재는 사상적 측면에서 모든 범주를 다룬다. 거기서 우리는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것, 궁정의 초상과 풍속, 에로티시즘과 전쟁, 일상생활과 정치적 풍자를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다룬 가공할 만한 주제들 속에서 악몽과 마법, 광기라는 '저 너머'의 세계 역시 보게 된다. 이러한 모티브들은 회화와 시의 절대성에 도달하려는 견자로서의 능력을 통해 탐구되었다.

대표 작품

관련 자료

각주

  1. 다크마어 페겔름(2008), 『I, Goya: 고야가 말하는 고야의 삶과 예술』, 김영선 옮김, 예경.
  2. 위의 책, 153쪽.
  3. 위의 책, 157쪽.
  4. 위의 책, 161쪽.
  5. 위의 책, 169쪽.
  6. 위의 책, 177쪽.
  7. 위의 책, 181쪽.
  8. 줄리아노 세라피니(2009), 『고야: 혼란의 역사를 기록하다』, 정지윤 옮김, 마로니에북스, 10-12쪽.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