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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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스페인어: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년 3월 30일 - 1828년 4월 16일)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고야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 스페인 예술가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며, 중세시대 마지막 거장이자 근대의 시작으로 불리기도 한다.[1]


생애

아라곤, 로마 (1760-1774)[2]

"로마와 에스파냐에서 유명한 화가와 그림들을 직접 관찰한 데서 가장 큰 소득을 얻었으며, 그 경험이 나의 유일한 스승이었다." - 고야[3]

고야는 고향 아라곤의 화가 호세 루산 밑에서 화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유명한 판화 작품을 모사하도록 했던 루산의 교육 방식으로 인해 고야는 일찍부터 판화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마드리드에서 열린 경연대회에서 두 차례에 결쳐 낙선한 후 1770년 고야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로마에서 고대 조각품에 매료되어 중요한 작품을 데생하고 연구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이러한 과정은 훗날의 작품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 여행이 끝나갈 무렵 고야는 자신감과 독자적 감각을 얻게 되었다.

마드리드 (1775-1786)[4]

1775년 1월 마드리드로 이주한 고야는 태피스트리의 밑그림 도안으로 궁정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소소한 일상생활을 묘사하는 새로운 사실주의적 경향이 일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고야도 일상적인 주제를 묘사하는 데 몰두했다. 태피스트리 밑그림과 벨라스케스의 유화를 모사한 에칭 연작으로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1780년 마침내 아카데미 회원의 지위를 얻었고, 개인 후원자와 그들의 초상화를 통해 마드리드에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왕의 전속화가 (1786-1808)[5]

"나는 많은 힘과 시간을 들이고 있다. 내 지위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고, 어쨌든 나는 그것도 좋아한다." - 고야[6]

1786년 카를로스 3세의 전속화가로 임명된 고야는 이후 전형적인 18세기식 자세를 취한 궁정관리들과 귀족들을 그린 초기 초상화를 제작했다. 한편으로는 이때부터 서서히 인생의 본질을 철저히 탐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1790년대에 이르자 주제의 변화는 더욱 뚜렷해졌다. 1792년에 병을 앓고 청력을 상실하게 된 뒤 그의 예술은 새로운 특성을 띠게 되는데, 예리한 관찰력과 비판력으로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했으며, 이는 1799년 출간된 판화집 «변덕»으로 이어졌다.

나폴레옹 치하의 궁정화가 (1808-1814)[7]

고야는 나폴레옹 치하에서 궁정화가의 신분을 유지하며 공식 초상화를 그리는 한편, 독립전쟁에 대한 기록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때 제작한 «전쟁의 참화»라는 동판화 연작은 침략과 전쟁의 공포 및 그 비참한 결과를 생생히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처절한 전쟁의 참상을 기록형식의 사실주의가 아니라 선묘와 애쿼틴트를 써서 극적으로 구성했으며, 빈틈없는 세부묘사로 실물 같은 생생한 효과를 창조해냈다.

페르난도 7세의 궁정화가 (1814-1824)[8]

전쟁이 끝난 뒤 복귀된 부르봉 왕조의 궁정에서도 고야는 여전히 수석화가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 치하의 폭정에 직면하여 우울하고 풍자적이며 섬뜩한 소재의 작품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린 종교화 몇 점은 초기의 어떤 작품보다도 진지한 신앙을 보여준다. 그러나 '귀머거리의 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저택의 벽을 장식한 수수께끼 같은 '검은 그림들'과 비슷한 시기에 만든 동판화 연작 «어리석음»은 표현주의 기법으로 악몽 같은 환상을 보여주며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절망을 반영했다.

프랑스 (1824-1828)[9]

1824년 자유주의 정부를 세우려는 기도가 실패로 끝난 뒤 페르난도 7세의 폭정이 다시 시작되자, 고야는 프랑스로 떠난다. 그는 잠시 파리에 머물다가 보르도를 망명지로 선택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말년의 작품들은 그의 끊임없는 실험 정신과 독창성을 보여준다.


작품

역사적 의미[10]

역사적으로 볼 때, 프란시스코 고야의 천재성은 강렬한 갈등과 이중적 함의가 담긴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양식을 통해 창작기간 내내 지속되었던 특출한 선구자로서의 면모ー인상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가 그의 영향을 받았다ー에서 잘 드러난다.

연구자들이 고야를 떠올릴 때 가장 강조하는 특성은 근대성이다. 이는 그의 전 작품에 걸쳐 지속되었던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이는 장래의 선택에 대한 가정 없이 계속된다. 게다가 매 시기 높은 결과를 얻음으로써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위대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고야는 끊임없는 모험 속에서 놀라운 독창성을 창조하고 구축했다. 미술사상 그보다 억누를 수 없는 열정과 때로는 실험적이고 때로는 극단적인 관능성을 보여준 예술가는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로운 창조자', 고독한 천재로서의 고야를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고야는 많은 예술가들의 삶이 이야기 될 때 그랬던 것처럼 몰이해되거나 저주받은 경우도 아니었으며, 벼락출세를 이룬 자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1786년 어릴 적 친구인 마르틴 사파테르에게 쓴 편지에서 그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솔직히 얘기해보세.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라면, 최대한 많은 이익을 누리려고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이러한 현실적 사고는 정확히 어떤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이 지속되는 어느 역사적 순간의 증인이자 주인공이어야 하므로, 고야의 제일 목표를 충족시키는 사고는 곧 근대성에 대한 목마름이었던 것이다. 그와 더불어 냉소주의도 그의 일부를 차지하게 된다.

실제로 고야는 자신의 시대를 강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18세기로 나아가는 데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역사적 특성을 끊임없이 적용했다. 고야는 한 시기가 종말에 이르렀으며, 다른 시기가 갈등의 싹을 지닌 채 미지의 사건들을 가져오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과 사물을 특정짓는 구체적 문명 즉, 정치적 질서와 사회적인 질서라는 두 세계 사이의 변환기를 해석한 '전환기'의 예술가였다. 유럽의 정치적 의식이 군주제로부터 국가체제로 옮겨가는 데 직면하자, 예술은 부르주아 사회의 이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예전의 궁정양식을 버린다. 이는 고야의 직관 속에 자리 잡은 풍부한 창조성을 분출시킨다. 이는 미술사의 통상적인 전개양상을 뒤엎는 파격적 사건으로, 모든 것은 유럽의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로코코 양식이 백과사전파에게 길을 내준 시기와 일치한다. 백과사전파는 계몽주의인본주의를 장착한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사상으로 이성과 감성,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똑같이 양분을 제공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시대로 이행되는 시기에, 이 아라곤의 화가가 처했던 한 인간과 예술가로서의 운명은 당대의 이념적 정신적 미학적 질서에 반응하면서, 시대가 잉태한 사회적 악에 대하여 비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의 여정 속에서 지적 호기심을 버리지 않은 채, 이 강렬한 열망은 고야의 예술 속에 변화의 기반으로 남게 된다. 그가 다룬 그림의 소재는 사상적 측면에서 모든 범주를 다룬다. 거기서 우리는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것, 궁정의 초상과 풍속, 에로티시즘과 전쟁, 일상생활과 정치적 풍자를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다룬 가공할 만한 주제들 속에서 악몽과 마법, 광기라는 '저 너머'의 세계 역시 보게 된다. 이러한 모티브들은 회화와 시의 절대성에 도달하려는 견자로서의 능력을 통해 탐구되었다.

대표 작품

<옷을 벗은 마하 Naked Maja>, 1798-1805년경, 캔버스에 유채, 95x190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옷을 입은 마하 Clothed Maja>, 1798-1805년경, 캔버스에 유채, 97x190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그림 카를로스 4세의 가족.jpeg

<카를로스 4세의 가족 The Family of Carlos Ⅳ>, 1800-01,
캔버스에 유채, 280x267cm, 산 페르난도 왕립미술원, 마드리드.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프란시스코 고야, <사투르누스 Saturn>, 1820-23, 회반죽을 입힌 캔버스에 유채, 146x83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고야는 여기서 무(無)와 혼돈에서 생겨나는 괴물을 보여준다. 이 괴물은 시간과 죽음을 공격적으로
집어삼킨다. 이 작품은 낫과 모래시계를 가진 크로노스 혹은 사투르누스에 대한 어떤 관습적인
묘사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다. 이 작품에 <사투르누스>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고야 자신이 아니었다.
에스파냐에서 사투르누스는 '마녀의 연회'에 모인 악마들의 우두머리, 그리고 절대군주제의 은유로
여겨지기도 했다.[11]


어록

"까다로운 회화예술은 다른 무엇보다도 신성(神性)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1792년 고야가 왕립미술원에 제출한 보고서[12]
"회화에 비법이란 없습니다. 그것은 타고난 재능과 꾸준한 연구, 이성에 달려 있으며 이들이 함께 어울려 최고의 성취를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1891년 2월 7일 고야가 페드로 세바요스에게 쓴 편지[13]
"나는 불평하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네.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보다 더 부자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네."

1781년 10월 20일 고야가 마르틴 사파테르에게 쓴 편지[14]
"만약 누군가 내 그림을 원한다면, 그 사람들이 나한테 와야만 하네. 그리고 유명인사나 친구의 부탁이 아니라면 내 그림을 갖기 힘들 것이네. 나는 누군가를 위해 그림을 그리지는 않을 테니 말일세."

1786년 8월 고야가 마르틴 사파테르에게 쓴 편지[15]
"병고에 사로잡힌 상상력을 이끌어내고 빚을 갚기 위해, 나는 일련의 소품들에 전념해왔습니다. 그 작품들을 그리면서 대상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관찰을 통해 그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주문을 받아 그리는 작품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런 작품을 제작할 때는 공상이나 창안의 여지가 없습니다."

1794년 1월 4일 고야가 베르나르도 데 이리아테에게 쓴 편지[16]
"나의 스승은 셋이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그리고 자연."

1826년 프라도 미술관 카탈로그에 실린 고야의 생애[17]
"나는 시력도 나쁘고 손도 떨리네. 그리고 펜도 잉크도 없어. 내 의지 외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네."

1825년 12월 20일 고야가 호아킨 페레르에게 보낸 편지[18]
"나는 마녀, 도깨비, 유령, 허풍 떠는 거인, 무뢰한이나 악당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네. 인간 외의 다른 어떤 존재도 두렵지 않다네."

고야가 마르틴 사파테르에게 보낸 날짜 미상의 편지[19]
"회화에 규칙은 없다."

1792년 고야가 왕립미술원에 제출한 보고서[20]
"이해할 수 없이 애매하고 혼란스럽거나 조절 안 되는 열정들에 영향받은, 지금까지 인간의 마음에만 존재했던 형상과 심적 상태를 인간의 눈앞에 보여주려는 사람에게는 공로 또한 있다."

1799년 연작 판화 «변덕»에 대해 고야가 한 말[21]
"인간의 과오와 악덕에 대한 비판은 주로 수사학과 시의 기능에 속하는 것이지만, 회화의 주제도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고야, 1799[22]


평가

"자신의 상상력만이 고야의 스승이었다. 그는 다른 화가들의 기법을 관찰하고 로마와 에스파냐의 유명한 작품들을 연구함으로써 대부분의 것을 얻었다."

1826년 프라도 미술관 카탈로그에 실린 고야의 생애[23]
"아무리 미술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오렌지 구매나 농업기술 연구를 위해서 오든 브로커나 정치가이든, 에스파냐에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고야를 피해갈 수는 없다. 그는 가장 훌륭한 에스파냐 가이드이다."

일리야 에른부르크, 1932[24]
"고야는 남의 호감을 사기 위한 그림을 과감히 그만둔 날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했다."

앙드레 말로, 1928[25]
"고야는 에스파냐의 국민화가이다. 그는 빠르게 사라져가는 옛 풍습들의 마지막 흔적들을 화폭에 담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테오필 고티에, 1838[26]
"우리는 고야에게서 진정 우리 시대의 숱한 예술적 경험의 원천이 솟아나옴을 본다."

알폰소 E. 산체스, 1989[27]
"휘갈긴 선과 검은 얼룩, 흰 선이 살아 있거나 죽은 사람의 윤곽을 만들고, 그 인물의 얼굴은 우리의 마음에 지울 수 없이 아로새겨진다."

테오필 고티에, 1838[28]
"고야는 팬에서 구워지는 태아, 악마를 유혹하기 위해 스타킹을 끌어올리는 벌거벗은 소녀들이 보고 있는 거울 속의 노파 등 헤아릴 수 없는 것들로 악몽을 채웠다."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 1857[29]
"옛 에스파냐의 미술은 고야와 함께 죽었다. 벨라스케스의 빛, 엘 그레코의 지독한 색조, 투우, 마하, 마놀라, 경찰, 밀수업자, 도둑, 집시,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마녀보다도 훨씬 사악한 에스파냐의 마녀 등, 에스파냐의 전통과 관습이 고야와 함께 죽었다."

배런 테일러, 1830년경[30]


연대표

출처: 줄리아노 세라피니, 『고야: 혼란의 역사를 기록하다』, 정지윤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9.
역사적ㆍ예술적 사건 고야의 생애
오스트리아 계승전쟁(1748년까지). 1740
퓌슬리, 취리히에서 출생. 1741
스페인의 왕 부르봉의 펠리페 6세 사망. 페르디난도 6세 즉위. 1746 3월 30일 프란시스코 고야, 푸엔데토도스(사라고사)에서 금세공사인 아버지와 아라곤의 하급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
에스라샤펠에서 평화조약.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됨. 자크 루이 다비드, 파리에서 출생.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출판. 1748
괴테,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 1749
디드로와 달랑베르 「백과사전」 1권 출판. 1751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간에 아란후에스 조약. 1752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프랑스 간에 7년 전쟁(1763년 종전). 모차르트, 잘츠부르크에서 출생. 1756
카노바, 파사뇨(트레비조)에서 출생. 블레이크, 런던서 출생. 1757
클레멘스 8세 교황으로 선출. 1758
스페인의 왕 페르디난도 6세 사망. 카를로스 3세 왕위 계승. 1759
1760 기독교 형제의 학교에서 수학한 후, 화가 호세 루산 마르티네스의 제자가 됨.
'보헤미아' 화가인 멩스, 마드리드 도착. 1761
잠바티스타 티에폴로, 마드리드 도착하여 여생을 보냄. 루소의 『사회계약론』. 1762
파리조약으로 7년 전쟁 종결. 볼테르, 『관용론』 저술. 1763
빙켈만, '고대 예술사' 저술. 1764
자킨토, 나폴리에서 사망. 1765
예수회 추방(스페인과 프랑스). 1767
카날레토, 베네치아에서 사망. 1768
와트, 증기기관 첫 발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아작시오에서 출생. 1769 연말에 고야가 로마로 돌아가는 멩스를 동행했을 가능성 있음.
잠바티스타 티에폴로, 마드리드에서 사망. 베토벤, 본에서 출생. 헤겔, 슈투르가르트에서 출생. 1770 고야 1년간 로마에 머문 것으로 추정. 파르마의 아카데미 경연대회에 작품을 보냄. 그의 작품이 특별상을 수상.
1771 스페인으로 돌아와, 사라고사의 필라르 대성당 성가대석 둥근 천장에 프레스코 장식의 요청을 받음.
1772 6월 천장 장식 작업 완수. 다른 성당의 작업 요청이 뒤따름.
보스턴의 상권을 두고 영국과 미국의 마찰. 클레멘스 14세 예수회를 해산. 1773 마드리드에서 화가 형제 라몬과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여동생인 호세파 바예우와 결혼.
프랑스의 왕으로 루이 16세. 괴테, 『베르테르』 저술. 1774 아울라 데이 모임에 참여. 연말, 프란시스코 바예우와 마리아노 살바도르 마에야의 감독하에 왕궁의 태피스트리 장식을 위한 밑그림 작업을 위해 마드리드로 불려감.
터너, 런던에서 출생. 1775
미합중국 독립 선언. 1776
볼테르와 루소 사망. 1778 청력상실에 이르게 될 병후 처음 보임.
멩스, 로마에서 사망. 1779 프라도의 아스투리에스 왕자의 방을 위한 7점의 태피스트리 밑그림 맡음.
앵그르, 몽토방에서 출생. 1780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제출하여 산페르난도 아카데미에 들어감. 사라고사 필라르 대성당의 프레스코 주문을 받음.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1781 마드리드의 산프란시스코 엘 그란데의 제단 장식을 맡음.
라클로, 『위험한 관계』 저술. 1782
베르사유 평화협정.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 스페인, 미노르크 섬과 플로리다를 차지. 몽골피에의 열기구 발명. 퓌슬리, <악몽> 제작. 스탕달, 그르노블서 출생. 1783 8월, 카를로스 3세의 형제인 부르봉의 루이스가 고야를 아레나스 데 산피에트로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함.
피에트로 롱기, 베네치아에서 사망. 만초니, 밀라노에서 출생. 1785 산페르난도 아카데미의 회화 부감독이 됨.
직조기 발명. 1786 라몬 바예우와 함께 궁정화가로 임명됨.
미합중국 헌법 제정, 최초의 근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됨. 1787 산타아나 데 바야돌리드의 제단화 3점을 그림.
프랑스에서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3세 사망, 카를로스 4세,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왕비와 그를 계승. 바이런, 런던서 출생. 1788
워싱턴, 미합중국 첫 대통령. 프랑스 혁명. 인권 선언. 1789 스페인 왕들의 업적을 다룬 초상화 작업을 맡음. 궁정화가로 임명됨.
버크,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 저술. 프랑스에서 종교질서에 대한 박해. 1790
루이 16세, 바렌으로 도주. 제리코, 루앙서 출생. 모차르트, 빈에서 사망. 사드,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 출간. 1791 카를로스 4세의 에스쿠리알 저택 살롱을 위한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완성.
프랑스, 공화정 선포.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에 전쟁 선포. 프랑스, 공화주의자에 대항한 연합 전쟁 시작. 로시니 출생. 1792 카디스에서 중병에 걸려 청력 거의 손실.
루이 16세 처형. 공포정치 시대. 마라와 다비드 사망. 1793 마드리드로 돌아옴. 라몬 바예우 사망.
프랑스, 프러시아, 네덜란드, 스페인 간 평화조약. 1795 프란시스코 바예우 사망. 고야는 산페르난도 아카데미의 회화 감독으로 선출됨.
보나파르트의 이탈리아 원정. 1796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 캄포포르미오 협정. 베네치아가 오스트리아에 넘어감. 블레이크, 영의 『밤의 상념』에 삽화를 그림. 1797 청력손실을 이유로 휴가를 받음.
콜리지와 워즈워스, 『서정가요집』 저술,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선언으로 간주됨.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 들라크루아 출생. 1798 마드리드의 산악토니오 데 라플로리다의 프레스코를 시작함. 판화집 『카프리초스』를 제작.
나폴레옹, 첫 통령이 됨. 발자크, 투르에서 출생. 1799
볼타, 전지를 발명.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제작. 1800
프랑스와 영국 간 아미앵 평화협정. 빅토르 위고, 브장송에서 출생. 1802
나폴레옹,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 1803
나폴레옹, 이탈리아의 왕이 됨. 1804
트라팔가 해전과 오스털리츠 전투. 1805
나폴레옹, 레나와 아우어스데트에서 승리. 영국에 대한 봉쇄. 1806
헤겔의 『정신현상학』. 피히테, 『독일 국민에게 고함』. 1807
카를로스 4세, 아들인 페르디난도 7세에게 왕위를 물려줌. 프랑스군의 스페인 점령. 조제프 보나파르트, 스페인의 왕위에 오름. 외국 정권에 대한 스페인의 봉기. 앵그르, <목욕하는 여인> 제작. 1808 새로운 왕 페르디난도 7세의 초상화를 그림.
에드가 앨런 포, 보스턴에서 출생. 1809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역에서 반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출범. 1810 조제프 보나파르트 왕에 대한 우의적 그림을 제작. 판화 『전쟁의 참화』 연작 시작.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 시작. 웰링턴 공작, 마드리드로 입성하여 프랑스군을 퇴각시킴. 1812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를 그림. 부인 호세파 바예우 사망.
라이프치히 전투. 페르디난도 7세, 스페인 왕 복귀. 슈타엘 부인, 『독일에 관하여』 출판. 1813
파리동맹 결성. 루이 18세와 함께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 왕좌 복귀. 빈 의회. 1814
나폴레옹의 프랑스 귀환. 백일천하.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 생트알리앙스 조약. 1815 판화 『타우로마키』 연작 작업 시작.
1816 프랑스에 대한 스페인의 저항을 찬양한 <1808년 5월 3일, '프린시페 피오' 산에서의 처형>을 그림. 왕위에 복귀한 페르디난도 7세의 초상화 그림.
마르크스, 트리어에서 출생. 1818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제작. 1819 마드리드 근교에 '귀머거리의 집'이라고 알려질 집을 구입. 겨울 중병에 걸림.
카디스에서 스페인 군대의 반란. 페르디난도 7세, 헌법을 받아들임. 윌터 스콧, 『아이반호』 출판. 1820 병이 지속됨. 『전쟁의 참화』 연작을 끝내고, 『검은 그림』 연작과 다른 환영적 작품을 시작한 것으로 보임.
나폴레옹, 세인트헬레나에서 사망. 중앙아메리카 지역 식민지 대부분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터키와 그리스 간 전쟁. 도스토옙스키와 보들레르 출생. 1821
그리스의 독립 선언. 카노바, 베네치아에서 사망. 1822
영국에서 노조 인정. 바이런, 미솔롱기온에서 사망. 1824 첫 프랑스 방문. 보르도와 파리에 감. 투우를 주제로 회화 및 석판화를 제작.
퓌슬리가 런던에서, 다비드가 브뤼셀에서 사망. 1825
블레이크, 런던서 사망. 1827
1828 고야, 4월 15일과 16일 사이 밤 보르도에서 사망. 1919년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로 이장됨.


관련 자료


각주

  1. "Francisco Goya",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co_Goya
  2. 다크마어 페겔름(2008), 『I, Goya: 고야가 말하는 고야의 삶과 예술』, 김영선 옮김, 예경, 153쪽.
  3. 위의 책, 154쪽.
  4. 위의 책, 157쪽.
  5. 위의 책, 161쪽.
  6. 위의 책, 162쪽.
  7. 위의 책, 169쪽.
  8. 위의 책, 177쪽.
  9. 위의 책, 181쪽.
  10. 줄리아노 세라피니(2009), 『고야: 혼란의 역사를 기록하다』, 정지윤 옮김, 마로니에북스, 10-12쪽.
  11.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125쪽.
  12.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1쪽.
  13.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2쪽.
  14.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4쪽.
  15.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6쪽.
  16.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8쪽.
  17.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17쪽.
  18.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18쪽.
  19.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25쪽.
  20.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26쪽.
  21.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29쪽.
  22.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166쪽.
  23.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14쪽.
  24.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159쪽.
  25.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163쪽.
  26.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165쪽.
  27.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167쪽.
  28.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170쪽.
  29.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173쪽.
  30. 다크마어 페겔름, 앞의 책, 183쪽.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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