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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culture.go.kr/data/data/view.do?url=http%3A%2F%2Fwww.naa.go.kr%2Fsite%2Fmain%2Fnaa%2Fmember%2Fview%3FmemId%3D345&contextName=http%3A%2F%2F175.125.91.144%3A8983%2Fopenapi%2Frdf%2Fmember.rdf%3Ftypeg%3D2&category=A04 문화데이터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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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2019년 11월 25일 (월) 17:52 판


2019년 지식의 공유(N) 콘텐츠

개요

성북구에서 출생했거나 성북구에서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 문인들에 관한 문서이다.

박완서


개요

박완서(1931년 10월 20일 ~ 2011년 1월 22일)는 대한민국소설가이다. 본관은 반남이며 경기도 개풍군 출생이다. 40세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나목으로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등단한 이후 꾸준히 소설산문을 쓰며 작가로 활동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전쟁의 비극, 중산층의 삶, 여성문제"를 다루었으며, 자신만의 문체와 시각으로 작품을 서술하였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2011년 1월 22일에 지병인 담낭암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81세. 소설가 정이현은 추모의 편지에서 "‘한국 문단에 박완서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수많은 여성작가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희망이었는지 선생님은 아실까요"라고 적었다.


작품

책 이름 출시일 페이지 출판사 비고
나목 1970년 284쪽 여성동아 장편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1972년 208쪽 한발기, 여성동아 단편
지렁이 울음소리 1973년 신동아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1976년 469쪽 일지사 단편집
휘청거리는 오후 1977년 546쪽 창작과비평사 장편
목마른 계절 1978년 328쪽 수문서관 장편
욕망의 응달 1979년 320쪽 수문서관 장편
살아 있는 날의 시작 1980년 364쪽 전예원 단편
엄마의 말뚝 1982년 171쪽 일월서각 단편집
오만과 몽상 1980.12-1982.3 448쪽 한국문학 연재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1983년 530쪽 세계사
그 가을의 사흘동안 1985년 426쪽 나남 장편
도시의 흉년 1979년 문학사상사 장편
미망 1990년 436쪽 문학사상사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92년 10월 15일 294쪽 웅진닷컴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1995년
2005년
324쪽
375쪽
웅진출판
아주 오래된 농담 2000년 324쪽 실천문학사
그 남자네 집 2004년 310쪽 현대문학
친절한 복희씨 2008년 302쪽 문학과지성사
세 가지 소원
작가가 아끼는 이야기 모음
2009년 176쪽 마음산책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2010년 268쪽 현대문학 수필
세상에 예쁜 것 2012년 288쪽 마음산책 산문
자전거도둑 1979년 288쪽 마음산책 산문


박완서의 작품 속 성북구

  • [살아있는 날의 소망/박완서 지음/문학동네/2015]

나는 사촌들과 함께 큰 소쿠리를 가지고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그때 우리 집은 삼선교였는데 아리랑고개를 넘어 정릉까지는 걸어서 한참이었다. 더군다나 그때 정릉 숲은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전시라 지뢰가 묻혀 있을지도 모르고 공비가 숨어 있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 [도시의 흉년2/박완서 지음/세계사/2012]

…그때 이미 나는 순정이를 따라 정릉 개천가까지 와 있었다. 가뭄이 계속되는 한여름의 개천 물은 썩은 내를 풍 기며 정지해 있었고, 비탈 동네 한가운데 드높은 장대 끝의 백기도 축 늘어진 채 정지하고 있었다.…


…나는 내 구역질이 가장 심하던 여름날, 정릉 집에서 본 기묘한 광경을 상기했다. 그때, 이 여자는 그 불구의 다리를 애처롭게 끌고, 아버지의 횡포에 가까운 무자비한 혹사에 노예처럼 순종했었다.… 나는 정릉 집에 갈 때 마다 내가 이들 모자에게 불쾌하고도 절대적인 특권을갖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애야,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다.”로 시작해서 이 모에게 돈 20만 원을 거저주지 않고 꾸어준 걸 뉘우쳤고, 할머니가 정릉 새 절에 가실 때마다 돈을 많이 못 드린 걸 뉘우쳤고, 수희 언니를 돈을 흠뻑 들여서라도 대학에 못 보낸 걸 후회했고,…


…내일 일찍 정릉 새 절에 다녀오시도록 해야겠다. 무당 할멈, 아니지 참 보살님께 이게 무슨 재앙인지 여쭈어봐 가지고 불공을 드리든지 살풀일 하든지 하고 나서 일을 시작해도 시작해야 할까 보다.…


…정릉 살 땐 그래도 엎으라지면 코 닿을 데 당신이 계 시겠거니 형님이 계시겠거니 그저 그거 하나만 믿고 허구 헌 날 하는 독수공방이 쓸쓸한지도 무서운지도 모르겠더니만…


  • [박완서 전집/박완서 지음/세계사/1993]

정릉 집 앞에 다다를 때 까지도 날은 밝지 않았다. 차마 그 시각에 문을 두드릴 수는 없었다. 다시 연탄재가 쌓이기 시작하는 더럽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춥고 비참한 기분으로 방황했다. 날이 밝아 오는 것과 함께 하나 둘 구멍가게들이 문을...(p97)

  • [그 남자네 집/박완서 지음/현대문학/2004]

성신여대면 돈암동에 있을 텐데? 나는 좀 놀란 소리로 물었다. 맞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동으로 나누어져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고 후배가 가르쳐 준 건 새 이름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쪽 지리에 훤했다. 위치를 자세히 물어보니 성신여대와 성북경찰서 사이였다. 내 처녀 적의 마지막 집도 성신여고와 성북경찰서 사이에 있었다.…


80년대 초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가서 센 강을 보고 애걔걔 그 유명한 센 강이 겨우 안감내만 하네, 라고 생각할 정도로 내 기억 속의 안감내는 개천치고는 넓은 시냇물이었다. 집만 나서면 개천 건너로 곧바로 성북경찰서의 음흉한 뒷모습과 거기 속한 너른 마당이 바라다보였다…

박완서 작품 속 안감내.jpg


북악산 줄기인 구준봉 기슭에서 발원하여 성북구 성북동과 동대문구 신설동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가는 하천으로서, 성북천 · 안감내 · 안암내라고도 한다. 좁게는 성북천의 하류로 안암동 지역에 와서 안암내라고 하였는데, 변하여 안감내가 되었다.

출처: 성북구립도서관

신경림


신경림(1936년 4월 6일 ~)

생애

충청북도 충주 출생이며 본관은 아주이다. 1936년 4월 6일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1943년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하고, 4학년 때 당숙과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 낙원의 이미지로 나오곤 하던 목계에서 이때 본 풍경을 공책 한 귀퉁이에 글로 남기는데, 이것이 선생의 눈에 띄면서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생한다. 피난살이를 하던 그의 가족은 9·28수복 뒤 곧바로 집을 찾았다가 미처 후퇴하지 못했던 인민군을 피해 그의 집안에서 운영하던 광산 근처의 산 속에 숨어 며칠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광산에 숨어살던 광부 셋을 헌병이 총으로 쏴 죽이는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사람을 죽이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뒤 신경림은 며칠 동안 악몽에 시달리며, 나중에 글을 쓰게 된다면 광산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이 결심으로 나온 시가 바로 〈폐광〉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신경림은 학업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한 절씩 남한강가를 배회하는가 하면 국어 시험지를 백지로 내는 등 문제 학생이라는 딱지가 붙게 된다. 그러나 당시 국어교사이던 유촌 선생은 처벌 대신 시 다섯 편을 써오라는 과제를 내는데, 이 과제물을 매개로 신경림은 유종호와 처음 만나게 된다. 유촌 선생의 아들이며 고등학교 선배인 유종호가 신경림이 낸 시를 읽고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은 나중까지 이어져 문단에서 유종호는 시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1955년 신경림은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 사이 집안 형편이 더욱 어려워져 그는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며 쉽지 않은 서울 생활을 한다. 1956년 이한직의 추천으로 진보적 성향의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오게 된다. 이즈음 그는 금서를 읽던 친구가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되는 일을 겪는다. 그는 이 일로 인한 충격과, 평소 품고 있던 문단에 대한 불신이 겹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신경림은 평창·영월·문경·춘천 등지를 떠돌며 광부·농부·장사꾼·인부·강사 등으로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시와 점점 멀어지면서 사회·과학 서적은 더러 봐도 문학 서적은 읽지 않으며, 소중히 간직해온 시집과 문학잡지마저 몽땅 버리기도 했다.
서른 즈음, 신경림은 결혼할 무렵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시 쓰는 일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충주에서 짐을 싸들고 서울 홍은동 김관식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본격적으로 시 쓰기에 몰두한다. 1970년 신경림은 유종호의 소개로 《창작과비평》에 시편들을 발표하는데, 〈농무〉는 이 가운데 한 작품이다.  민중적 화자를 내세워 민중의 현실과 정서를 생생히 보여주는 그의 빼어난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은 당대 문단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신경림은 《농무》 한 권으로 새로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으로 자리매김 되고,제1회 ‘만해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농무》로 이름이 알려지긴 했지만 1970년대에 신경림은 거듭된 불운과 궁핍으로 몹시 가파르고 힘든 나날을 보낸다. 어려운 시절을 군말 없이 함께 견딘 아내가 첫 시집이 나오는 것을 못 보고 눈을 감으며, 4년 뒤에는 어머니가, 또 한 해가 못 되어 병중에 있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때의 고단했던 삶이 나타난 시는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이다. 그는 김관식의 집에서 나와 안양으로 내려가 조태일과 어울리며 기원에서 하루를 보내고, 《교육평론》의 편집부원으로 잠시 몸을 담기도 하나 이마저 기관의 압력으로 인해 그만두었다. 이때 받은 퇴직금으로 길음동에 집을 구해 삶의 근거를 서울에 마련하지만 궁핍한 생활은 지속되었다.
1980년 7월, 신경림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고은, 송기원과 함께 서대문구치소에 갇혔다가 두 달 만에 풀려났다. 1984년 신경림은 ‘민요연구회’를 꾸려 그동안 혼자 해오던 민요 채집을 여럿이 함께 하며 문화운동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1985년 그는 통일을 노래한 본격 민요 시집 《달 넘세》를 내놓고 1987년에는 장시집 《남한강》, 1988년에는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를 펴냈다. 《가난한 사랑노래》에서 신경림은 도시 변두리 빈민들의 삶으로 눈길을 돌려, 농민 시인에서 민중시인, 노동 시인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출처 이용약관

작품세계

신경림의 등단 작품인 「갈대」, 「묘비」 등은 대상을 농민으로 한정하지 않고 인간 삶의 보편적인 쓸쓸함과 고적함을 주된 분위기로 하고 있다. 첫 시집인 『농무』 이후 신경림의 시는 농민의 삶의 현장을 그린 시로 일관되어 있지만, 등단 초기의 서정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의 시는 농민의 고달픔을 다루면서도 항상 따뜻하고 잔잔한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감동을 준다. 그의 시는 여타의 노동시에 비해 강력한 울분이나 격렬한 항의, 개혁의 의지 등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이러한 특징은 신경림 시의 장점이자 한계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중간층의 독자를 확보하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다.『새재』 이후에 쓰여진 『민요기행』, 『남한강』, 『길』 등의 시집은 우리 것에 대한 시인의 애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우리 민요와 지리 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특히 장시집인 『남한강』은 농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시도로서, 서사적인 스케일을 보여주는 방대한 작품이다. 출처 CC-BY-SA

작품 및 저서

시집

기타 시집

동시집

산문집

  • 《바람의 풍경》(문이당, 2000년)
  • 《민요기행 1,2》
  • 《강따라 아리랑 찾아》
  • 《시인을 찾아서》

평론집

  • 《민중(民衆)과 문학(文學)》

출처 CC-BY-SL

이진명

김정환


김기택

황현산

편집되지 않은 자료들 - 추후 편집할 것 -

참고문헌/출처

관련 논문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