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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6일 (일) 19:09 판

개요

안창호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 이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도산, 산옹, 종교는 개신교이다. 독립운동의 방법론으로 민족개조론을 주창하였으며 민족개조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민족 스스로 힘과 실력을 기르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자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교육입국론을 주창하여 각종 교육기관의 설립과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의 실력양성론윤치호, 이광수, 최남선, 김성수 등에게 두루 영향을 주었다. 웅변과 연설에 뛰어나 많은 청년들을 감회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다.

생애

  • 연보

1878년 -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

1892년 - 평안남도 대동군으로 이사, 한학과 성리학을 수학하며 유학 공부

1894년 - 삼촌의 도움으로 가출 후 경성부 유학, 구세학당 보통부 입학, 산수, 지리, 세계사 등 새로운 학문 공부, 장로교 입교

1897년 - 구세학당 보통부 졸업, 이혜란과 약혼, 독립협회 가입, 이승만, 윤치호, 이상재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 참여, 독립협회 관서지부 조직, 전국 순회강연을 다님

1898년 - 경성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6개조의 정치혁신안 건의, 평안남도 강서군에 점진학교, 탄포리교회 설립

1902년 - 이혜련과 결혼, 미국으로 유학, 샌프란시스코 거주, 이후 리버사이드로 이사해 오렌지 따는 일을 함

1903년 - 재미 한인교포 조직인 한인친목회 조직, 교민 사회 단결을 위해 노력

1905년 - 한인공립협회 창립, 공립신보 발행, 윤치호, 서재필 등과 함께 을사조약 반대 운동 주도

1907년 - 조선 귀국, 신민회, 대성학교 설립을 위해 서울과 평양에서 강연, 경성에서 김구, 유길준, 이동휘, 이회영, 이승훈 등과 함께 신민회 조직, 안창호의 연설을 들은 여운형, 조만식 등이 독립운동에 투신, 대한유학생회에 초청되어 강연

1908년 - 평양대성학교 설립

1909년 - 김좌진, 이갑 등과 함께 서북학회 창립

1910년 - 한국통감부의 내각 참여 제의 거절, 국외망명을 떠남, 중국 청도에서 독립운동 인사들과 청도회담 개최, 조선귀국

1911년 - 만주에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했지만 무산,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감

1912년 -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대한인 국민회의 총회에 참석, 회장 당선, 공립신보신한민보로 이름을 바꾸어 간행

1913년 - 유길준의 사상에 깊이 공감, 흥사단조직 설립 계획 미국에서 흥사단 조직

1918년 -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음, 서재필에게 도움을 요청, 파리강화회의이승만, 서재필을 파견하였으나 실패

'1919년 -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으로 임명, 국무총리 대리에 선출, 한인연합회 참석,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 참석

1921년 - 이광수의 귀국을 만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승만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이동휘의 갈등을 중재

1922년 - 이광수, 주요한 등에게 연락하여 경성평양수양동우회, 동우구락부 발족 지시

1923년 - 만주에 이상촌 건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무산, 실력양성론, 인재 육성 주창, 대독립당 창당 계획

1924년 - 중국 남경동명학원 설립

1926년 - 민족주의자,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자를 규합하는 대독립당 운동 주도, 좌우합작 운동 주도

1928년 - 이동녕, 김구, 이동휘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대공주의 주창

1929년 - 필리핀에 이상촌 건설 계획, 필리핀의 거부로 무산

1932년 - 윤봉길의거에 관련자로 지목되어 체포,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에 수감

1935년 - 건강악화로 인한 대전형무소 보석 석방, 전국 순회강연을 다님, 평안남도 대동군에 은거

1937년 -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건강악화로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

1938년 -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폐렴, 간경화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

1962년 - 건국공로훈장 중장 추서

독립운동

안창호의 민족운동은 한일합방을 전후로 구국계몽운동시기와 자아혁신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으로 대별할 수 있다. 안창호의 민족운동 성격은 국망과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려는 민족의 힘에 대한 실천적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안창호는 국망의 원인을 거짓과 공리·공론으로 근대화하지 못한 민족 자체의 문제로 파악하고, 민족의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개인적·조직적·국가적 차원에서 민족의 혁명적 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안창호의 민족운동은 개인의 힘에서 시작하여 집단 및 국가의 힘으로 연결되는 역량축적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를 위해 학교 설립과 조직 결성 및 국가 건설을 위한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안창호는 국권회복을 위해서 민족운동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주의나 주장을 극복하고, 민족운동의 통합된 힘의 구축을 강조하였다. 또한 안창호는 개인·조직·국가차원의 통합된 힘을 형성함으로써 민족을 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안창호가 근대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계기는 청일전쟁을 겪은 뒤 서울로 상경하여 1894년 말 구세학당에 입학하면서 부터이다. 안창호는 서구 선교사들이 세운 구세학당에 들어가 선진 문물을 접촉하였고, 장로교에 입교하여 자유·평등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안창호는 청일전쟁을 목격하고 근대화하지 못한 민족의 힘이 없는 현실에서 빚어진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외세의 침략을 막아낼 힘은 서양의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책을 서둘러 추진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서양의 지식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것을 인지한 것이다.


  • 국내·외에서의 활동

안창호가 구세학당을 졸업할 무렵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운동이 시작되었다. 안창호는 1897년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만민공동회의 관서 지부를 발기하고 책임을 맡았다. 특히 안창호는 1898년 평양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무능한 관리들을 비판하는 쾌재정 연설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같은 독립협회운동의 경험은 안창호에게 국민계몽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였다. 독립협회운동이 대한제국 정부의 수구 세력에 의한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안창호는 강서지역으로 내려가 1899년 점진학교를 설립하여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1902년 교육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그의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안창호는 미국에서 한인 동포들의 열악한 환경을 목격하고, 학업을 중단하며 한인동포의 단결과 계몽을 목적으로 한인친목회를 1903년 결성하였다. 이후 친목회를 발전시켜 1905년 4월 공립협회를 창설하여 자신이 초대회장을 맡아 회관 건립과 공립신보를 발행하였다. 안창호가 미국에서 공립협회 운동에 매진하는 동안 국내 상황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의 내정 간섭을 핵심으로 하는 을사조약을 강요하는 등 식민지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안창호는 1907년 귀국하여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양기탁, 전덕기, 이동녕, 이동휘, 이갑, 유동열 등과 함께 1907년 비밀조직인 신민회를 경성에서 창립하였다. 신민회는 자아혁신, 곧 근대 시민으로서 신국민의 형성, 교육과 산업의 개량, 그리고 신국민의 통일연합으로 이루어지는 자유문명국으로서 국민국가의 건설을 운동의 기본 목표로 설정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이 체결되고, 탄압이 강화되자 안창호는 국외망명을 결심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안창호는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의를 개최하여, 민족의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 논의하였다. 청도회의가 결렬되자 미국으로 돌아온 안창호는 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을 주도하였고, 1913년 5월에는 동맹수련단체로 흥사단을 창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1917년 1월에는 북미 실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민족의 경제적 실력양성에도 힘썼다.


  • 임시정부 활동

안창호는 이후 1919년 4월 중순 상해에 도착해 상해 임시정부 내무 총장으로 취임해 활동하였다. 여기서 안창호는 독립운동의 통합 운동과 국내 통치를 위한 연통제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상해 임시정부독립운동의 노선 차이를 비롯하여, 지역적, 이념적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창호는 1921년 봄에 임시정부를 떠나게 된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안창호는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독립운동세력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 역시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눠 대립하면서 결국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안창호의 민족운동은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고 통합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안창호는 민족유일당 결성운동을 펼쳤는데, 정부와는 다른 별개의 당조직체를 결성해 정부 존립여부를 둘러싼 독립운동계의 분열 요인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유일당을 결성해 독립운동 세력 간의 독자적 활동과 헤게모니 쟁탈전을 피하고 통일된 주의와 강령으로 독립운동의 역량을 결집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1927년 말 중국의 국공합작이 깨지고 국민당공산당간의 내전이 발생하면서, 사회주의 계열은 민족유일당 운동에서 이탈하였다. 안창호는 좌우통합의 유일당 결성이 어렵다면, 우익 진영만이라도 정당조직을 결성한 후, 후일 좌우진영을 포용한 당조직체를 결성하는 수순을 밟고자 했다. 그리하여 1930년 1월 25일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다.


  • 이상촌 건설 노력

안창호가 다른 한편으로 심혈을 기울인 사업이 이상촌 건설운동이었다. 안창호의 민족운동 목표는 우리 민족의 부흥 운동과 민족의 생활 속에서 독립의 기초를 닦으려는 것이었으므로, 이를 위해서는 결국 이상촌 운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도산은 이상촌 계획으로 해외 독립근거지를 삼는 동시에 인격수양·민족성 혁신·근대국가 국민상의 형성을 위한 모형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도산은 이상촌 계획의 후보지로 만주 봉밀산, 길림, 중국 남경의 양자강 일대, 몽고, 필리핀 등 국외 각지를 답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필리핀에서는 만주의 한인들을 단체 이주시키기 위해서 필리핀 이민국과 협의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안창호의 이상촌운동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윤봉길의사 의거가 일어난 날, 관련자로 의심받아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됨으로써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였다.

사상과 신념

저서

<gallery> 안창호 도산일기.PNG 안창호 젊은이.PNG

  • 도산일기 *나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평가

관련 영상

  • 도산 안창호의 생애

  • [세계한민족문화대전] LA에서 도산안창호를 만나다

관련 콘텐츠

관련 유적

RDF표 및 온톨로지

항목A 항목B 관계
안창호 강연했다 만민공동회
안창호 설립했다 대성학교
안창호 참여했다 임시정부
안창호 조직했다 흥사단
안창호 주창했다 민족개조론

출처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