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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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세종대왕은 조선의 제4대 임금(국왕)으로 성은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이름은 도(祹)로 본명은 이도(李裪)이다. 자는 원정(元正), 시호는 장헌(莊憲), 존시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묘호는 세종(世宗), 능호는 영릉(英陵)이다. 세종은 태종(太宗)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며, 비(妃)는 심온(沈溫)의 딸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태종 8년(1408)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태종 12년(1412) 충녕대군(忠寧大君)에 진봉, 태종 18년(1418) 음력 6월 맏형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제(褆)가 폐세자(廢世子)가 됨으로써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음력 8월 22세(만21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세종대왕은 조선이 건국 되고 5년이 지난 1397년(태조 6년)에 태어났다. 그렇기에 고려인이었던 태조, 정종, 태종과 달리 첫 조선인 국왕이었다.
세종은 32년의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공적을 남겨 조선은 물론 한국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단 둘 뿐인 군주이다. 세종이 창제한 한글(훈민정음)은 현대 한반도(대한민국과 북한)의 공용 문자로 지정되어 통용되고 있다. 또한, 세종 시대에 확립된 북방의 국경은 그대로 한반도 이북 지역의 국경으로 자리 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세종의 업적은 현대 한국의 문화와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세종은 이순신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다.

생애

어린 시절(즉위 이전)

세종대왕은《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397년(태조 6년) 음력 4월 10일에 당시 정안군이었던 이방원정녕옹주였던 민씨의 6남으로 태어났다고 기재되어 있다. 위로 다섯 명의 형이 있었는데 맨 앞의 3명의 형은 세종이 어린 시절 일찍이 사망하여 양녕대군효령대군에 이어 3남으로 자랐다.

1408년(태종 8년), 12살에 충녕군에 봉해졌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 12년 뒤인 1412년(태종 12년)에 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세종은 어릴 적부터 한번 잡은 책은 끊임없이 읽었다고 한다. 단군 이래 최고의 독서덕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고 한다. 병을 앓고 있을 때도 계속해서 책을 읽으려고 하여 건강을 해칠까 염려한 태종이 방 안의 서책을 모조리 압수했지만 병풍 뒤, 몰래 숨겨둔 《구소수간(歐蘇手簡)》을 붙잡고 책이 해질 때까지 계속 읽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태종은 아들인 충녕(세종)의 취미 생활을 전적으로 지원하여 학문은 물론 미술, 음악, 산수, 천문학, 수석까지 다양한 부분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다양한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1418년(태종 18년) 6월 3일, 태종은 충녕대군(세종)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처음에는 양녕대군의 장남인 순성군을 세우겠다고 했지만 대신들의 반발로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 한 것이다. 충녕대군(세종)은 셋째 왕자였기에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첫째 왕자인 양녕대군이 평소의 망나니 같은 행동으로 인해 결국 폐세자가 되었고 영특하고 어질기로 유명했던 충녕대군(세종)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양녕대군이 일부러 양보했다고 하는 의견도 존재했지만 사실은 지나친 패악질로 인해 아버지 태종이 그를 비호하고자 해도 비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양녕대군은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려 세종의 재위 초기에 약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의 권력이 강해지며 양녕대군의 처우도 좋아졌다.


즉위 이후

태종은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한지 두달만인 1418년(태종 18년) 8월 10일 전격적으로 왕위를 물려준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1422년(세종 4년)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이 사망한 뒤에야 진정으로 조선의 국왕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 태종이 사망한 후에도 조정에는 태종 때의 사람들 뿐이었다. 1422년(세종 4년)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정현과 좌의정이었던 이원, 우의정이었던 정탁, 병조판서였던 조말생, 이조판서였던 허조, 호조판서였던 이지강 등 주변에는 온통 아버지 태종의 사람들만 있었다. 이들은 초장부터 세종을 잡고자 세종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뜻대로 일을 진행하려고 했다. 대표적으로 폐세자인 양녕대군에 관한 일이 있었다. 태종의 상을 치르고자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올라왔던 양녕대군을 탈상 전부터 다시 유배지로 보내라는 상소를 사헌부, 사간원, 육조, 의정부 등지에서 끊임없이 올렸다. 이때 내용 중, "양녕대군의 거취는 신들이 부왕이신 태종에게 위임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 있었다. 양녕대군의 일은 자기들이 태종에게 위임받았으니 지금의 왕도 절대 간섭하지 말라는 소리인 것이다. 이러한 상소가 계속되자 세종은 상소를 던지거나 무시했지만 결국 신하들의 압박에 양녕대군을 내보내게 된다.

 이제부터는 양녕이 들어온 때에 이와 같은 봉장(封章)은 다 접수하지 말라. 또 이 봉장의 글은 도대체가 진부한 말뿐이다. 전일에 올린 것과 다름이 없으니, 목판에 새겨 두고 찍어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냐. 또 이 봉장은 거꾸로 접어서 봉(封)하였구나. 
《세종실록》 62권, 세종 15년(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12월 27일 (병자) 4번째기사.

이런 상황이 계속 되던 와중에 세종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이는 1422년(세종 4년)에 발생한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이었다. 고려 말 김도련이라는 사람의 아버지가 함경도에서 양인 426명을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들어 자신이 관리하고, 당시의 권문세가 임견미에게 뇌물을 바쳐 이를 허용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임견미가 죽고 고려가 망하면서 노비들이 다시 양인으로 돌아왔는데, 조선에 들어와 아들 김도련이 노비 426명과 그 자손들까지 거의 천 명을 자기 소유 노비로 되찾겠다고 한 사건이다. 여기서 세종에게 기회가 된 것은 당시에 김도련이 조선의 권력자들에게 노비로 뇌물을 주어 큰 문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떠오른 병조판서 조말생부터 시작해서 평성부원군ㆍ우의정ㆍ좌의정ㆍ곡산부원군 등 여러 권력자들이 연루되었고 이 때 바쳐진 총 노비 수만 132구(당시 노비 1구당 현재 가치로 천만 원 정도)였다. 이 사건은 조선 초기 최고의 뇌물 스캔들로 불렸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주목 받지 않았으나 4년 뒤(1426년)에 사헌부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즉시 조말생은 파직되고 유배형을 받았는데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함경도에 사람을 보내 낱낱이 조사하도록 명한다. 이로 인해 태종의 신하들을 몰아내고 세종의 세력으로 조정을 다시금 채울 수 있었다. 이듬해 1427년(세종 9년) 1월, 황희를 좌의정, 맹사성을 우의정으로 승진시켜 세종은 본격적으로 성군으로서 행보를 시작했다.

1426년(세종 8년) 2월, 한양에 큰 화재가 발생했었다. 세종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종은 훌륭하게 후속 대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이 화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닌 조선 500년 동안 전쟁이 아닌 보통 때에 발생한 재난 중 한양을 가장 크게 피해 입힌 재난이었다. 이 사고의 시작은 1426년 2월 15일의 화재였다. 이날 경시서(京市署)와 북쪽의 행랑 106간, 한성부 중부(中部)의 인가 1630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불에 탔다. 당시 세종과 세자는 군사훈련 강무를 위해 강원도 횡성에 있어 중전이었던 소헌왕후가 대응을 총괄했는데 금성대군을 임신한 상태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다음 날인 16일에는 전옥서와 행랑 8간, 민가 200여 호가 불탔으며 보신각 종루까지 탈 뻔했으나 간신히 진압했다. 세종은 16일에 급보를 접하고 19일에 한양에 급히 돌아와서 만삭 중인 아내와 교대해 대응을 지휘했다. 큰 화재는 잡혔지만 소소한 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이를 틈타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는 등 재난이 끝나지 않자 세종은 계속해서 대책을 수립했다. 부상자의 치료와 이재민에 대한 식량의 배급 등 1차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화재 예방을 담당하는 금화도감을 설치하고 가옥의 개량 및 지나치게 좁은 도로들을 정비해 큰 화재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붙어있는 가옥을 적당히 이격시켜 다시 짓도록 조치함과 아울러 그 사이마다 우물을 파서 화재를 빠르게 진압할 수 있도록 한양의 도시 구조를 바꿔 놓았다.

  • 1427년(세종 9년) 5월, 박연이 경기도 남양에서 나는 옥으로 편경을 만들었다. 이제까지 편경은 중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다.
  • 1427년(세종 9년) 9월, 어린 왕족들의 교육을 위하여 종학(宗學)을 세웠다. 교육 내용이나 수준은 성균관과 비슷했으리라 추측한다.
  • 1429년(세종 11년) 2월, 주종소를 설치하여 편종을 법식대로 만들게 하였다.
  • 1429년(세종 11년) 5월, 정초 등이 농사직설을 편찬하였다.
  • 1429년(세종 11년) 6월, 돌을 던지는 군사인석척군을 폐지하고 단오 때 행해졌던 돌 던지는 놀이인 석척희를 금지하였다.
  • 1429년(세종 11년) 7월, 신라, 고구려, 백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 1430년(세종 12년) 2월, 농사직설을 반포하였다.
  • 1430년(세종 12년) 10월, 공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주는 법을 처음 제정하였다.
  • 1430년(세종 12년) 11월, 등에 매질을 가하는 편배를 금지하였다.
  • 1420년(세종 2년) 경자자, 1434년(세종 16년) 갑인자, 1436년(세종 18년) 병진자 등을 주조해 활판 인쇄 기술을 더욱 발전케 했다.
  • 1437년(세종 19년) 장영실, 이천 등에게 지시해 앙부일구, 자격루를 만들도록 하였다.



말년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만 전념하고 20대 초반에 왕위를 받아 열정적으로 국정을 돌보았다. 그리고 육식을 즐겨하였지만 몸을 쓰는 사냥 등을 즐겨하지 않아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비만과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살았다고 알려졌다. 결국 세종은 나이가 들어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고 재위 후반기에 들어 각종 질병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1442년(세종 24년)부터 세자 에게 국정을 대리청정 하였다. 국정에서 물러난 세종은 좋은 온천에 들러 안질을 치료하거나 요양을 하고 유명 사찰을 찾아 먼저 떠난 자식들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일으켰는데 훈민정음 창제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훈민정음
  • 1443년(세종 25년), 세종은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문·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백성들이 당시의 문자인 한자를 쉽게 배우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친히 28개 글자를 창제하였다.
  • 1444년(세종 26년)과 1445년(세종 27년),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이 연달아 세상을 떠났다.
  • 1446년(세종 28년), 왕비 소헌왕후마저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연이은 가족들의 사망 이후 세종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감지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하였다.

  • 1450년(세종 32년) 음2월 17일, 조선 한성부 영응대군 집 동별궁 사제에서 향년 52세에 승하하였다. 능호는 영릉(英陵)이다.
 임금이 영응 대군 집 동별궁에서 훙하다. 
임금이 영응 대군(永膺大君)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훙(薨)하였다. 【처음에 영응 대군 집을 지을 때, 명하여 한 궁을 따로 집 동편에 세워서 옮겨 거처할 곳을 준비하였다. 】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太宗)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書籍)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 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즉위함에 미쳐, 매일 사야(四夜, 사경) 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輪對)를 행하고, 다음 경연(經筵)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顧問)으로 하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證憑)과 원용(援用)을 살펴 조사하여서, 힘써 정신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아, 문(文)과 무(武)의 정치가 빠짐 없이 잘 되었고, 예악(禮樂)의 문(文)을 모두 일으켰으매,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 같은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하였으며, 두 형에게 우애하니, 사람이 이간질하는 말을 못하였다.
신하를 부리기를 예도로써 하고, 간(諫)하는 말을 어기지 않았으며, 대국을 섬기기를 정성으로써 하였고, 이웃나라를 사귀기를 신의로써 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늦으막에 비록 불사(佛事)로써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번도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한 적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하였다.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1450년, 명 경태(景泰) 원년) 2월 17일 (임진) 1번째기사.

관련 자료

전시 자료

훈민정음과 난중일기(전시) 사진.jpg]

영상 자료

  • 드라마, 영화
    • 다시보는 '뿌리깊은 나무' 한글의 창시자 세종대왕 모음.zip 《모았캐치 / 스브스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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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및 기여자

디지털과 지식콘텐츠(22-2) 수업의 일환으로 작성.
작성자 천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