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화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풍속화(風俗畵)

이칭 속화
분야 회화
시대 고대/고려/조선
유형 개념용어

정의

궁궐이 아닌 민간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속화'라고도 함.


우리나라의 풍속화

삼국시대

  • 고구려시대에는 고분 벽화를 통해서 당시 풍속화의 경향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4세기 후반에 5세기에 조성된 고분 벽화에 초상·풍속도가 유행하였다. <약수리벽화고분>, <장천1호벽화고분>, <무용총>, <각저총>, <쌍영총>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초상·풍속도이다.
무용총










  • 신라시대에는 고분 벽화 및 고분 출토품이나 전 등에 그려진 공예 표현에서 당시의 풍속화풍이 나타난다. 고분 벽화는 순흥 지역에 2기가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순흥읍내리벽화>는 문지기가 이 고분 벽화의 주제이다.
순흥읍내리벽화













고려시대

  • 고려시대에는 풍속화가 그다지 활발하게 발달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고려 후기의 호렵도가 대표적이다. 호복(胡服)의 복장에 변발을 한 인물이 말을 타고 달리거나 활시위을 당기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호렵도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풍속화가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조선 전기

  • 이 시기의 풍속화는 궁중 수요의 풍속화, 사인 풍속화, 서민 풍속화, 불화 속의 풍속 표현 등 다양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다른 장르에 비하여 크게 발달하지는 않았다.
  • 경직도의 제작 : 1489년(연산군 4년)에 명나라로부터 <누숙경직도 (樓璹耕織圖)>를 가져온 이후 경직도의 제작이 활발해졌다. 누숙경직도 밖에도 여러 경직 관계 그림들이 풍부하게 제작되었다.
경직도















  • 서민 풍속화로는 <감로도 (甘露圖)>가 대표적이다. 감로도 하단의 장면은 시대에 따라 내용, 비중, 이야기 전개 방법, 공간감, 인물 표현 양식 등이 달라진다. 즉, 이 부분이 조선시대 풍속화 양식의 지표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전기에는 하단의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고 환난의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다가 후기에는 하단의 비중이 커지면서 풍속의 장면이 대폭 증가하게 된다. 또한 전기의 평면적인 공간감이 후기에는 보다 깊이 있게 전개되는 변화를 보였다.
감로도










조선 후기

  • 조선 후기에는 궁중 수요의 풍속화와 민간 수요의 풍속화가 함께 발달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주목되는 점은 풍속화를 속화(俗畫)라는 명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속화는 원래 문인화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저속한 그림이라는 뜻의 가치 개념이다. 조선 후기에는 풍속화 또는 민화를 의미하는 분류 개념으로 그 의미가 바뀐 것이다. 세종과 중종 못지 않게 경직 관계 회화에 많은 관심을 쏟은 임금이 숙종이다. 이 시기에도 경직 관계 회화에 대한 기록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중국의 경직 관계 그림이 종종 도입된다.
  • 조선 후기 서민 풍속화는 윤두서와 조영석 등 사대부 화가들이 주도하였다. 풍속화는 처음에 하층민 생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노동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수준에서 출발하였지만 윤두서는 17세기 산수 인물화에서 점차적으로 풍속화의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였다. <짚신삼기>를 보면, 조선 중기 절파 화풍의 산수인물에서 등장 인물만 고사에서 농부나 일꾼으로 대체하는 정도에서 시작하였다.
짚신삼기

















  • 사대부 화가들의 선구자적인 노력은 18세기 후반 직업 화가인 화원들에 와서 비로소 그 결실을 맺게 된다. 화원은 신분의 성격상 사대부 화가에 비하여 표현의 제약이 적어지고 무엇보다도 백성의 정서적 색채를 짙게 표현하는 데 유리하였다. 통속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속에서 오랫동안 봉건적인 이념에 억눌려 왔던 감정과 색정 등의 본능이 점차 활발하고 거리낌없이 표출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여기에 김홍도(金弘道), 신윤복(申潤福), 김득신(金得臣) 등 당시 기라성 같은 화원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조선 후기 풍속화는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 김홍도는 풍속화에서 서민의 희로애락을 은유와 풍자로서 엮어 내어 생명감 넘치는 세계를 보여 주었다. <타작>을 보면, 경직 표현을 넘어선 칼날 같은 풍자가 돋보인다. 웃음을 함빡 머금고 열심히 일하는 일꾼들의 모습과 웃음과 마름의 흐트러진 자세를 통해서 계급간의 불공평한 관계를 극화시켜 표현하였다.
타작














  • 김홍도의 뒤를 이어 화원으로서 맹활약을 한 풍속화가로는 김득신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김홍도의 아류라고 평가받을 만큼 그의 화풍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돌발적인 상황 묘사나 인물의 성격 묘사에서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였다.

외국의 풍속화

유럽의 풍속화

서양에서는 단순히 ‘장르’라고도 한다. 서양에서는 1500년경 독일의 판화에서 시작되었다. 동판화로 풍속화를 연속적으로 그린 최초의 화가는 ‘하우스부흐의 화가’들이고, 17세기에 네덜란드에는 아드리안 판 오스타데, 스텐, 텔 보르프 등의 전문화가가 배출되었다. 18세기에는 프랑스의 와토가 궁정의 우아한 생활을 그리고 영국의 호거스는 상류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풍자적으로 그렸다.

중국의 풍속화

중국에서는 한대의 화상석(畵像石)·화상전(畵像塼)에서 수렵, 농경, 나들이, 연음(宴飮), 잡기, 악무(樂舞) 등의 원초적인 풍속화를 볼 수 있다. 육조 시대에는 월중(越中) 풍속도, 낙중거마투계도(洛中車馬鬪鷄圖) 같은 것을 그렸고 당대 이후 사녀도(仕女圖) 등이 유행해서 이후의 전통이 되었다.

개별문서가 존재하는 풍속화

미디어 위키

  • 김현희에 의해 작성된 페이지입니다.(2022.11.03.)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