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식문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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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우리의 신문학이 서구의 문학 갈래의 도입으로 형성되었고 문학사적으로 모든 시대에 걸쳐 한국 문학의 성립이 외국 문학의 영향을 받거나 외국 문학을 모방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로 임화가 주장한 이론이다.

이식문화론의 계보

임화 → 백철 → 조연현

임화의 이식문화론

카프의 서기장으로 좌익 이데올로기의 선봉에 서 있었던 마르크스주의자 임화

후대에 '이식문화론'이라고 불리게 되는 원전은 바로 「신문학사의 방법」이다. 임화는 1940년 1월 3일 ~ 20일까지 「신문학사의 방법」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며 『개설 조선신문학사』의 기술 방법론임을 알린다. 그동안 임화의 신문학사 연구는 1935년 10월 9일과 11월 3일에 『조선중앙일보』에 게재된 『조선신문학사론 서설』과 1939년 9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다시 『인문평론』 2권 10호에서 3권 3호까지 연재되었다가 중단된『개설 조선신문학사』로 집약된다.

『조선신문학사론 서설』은 이인직에서 최서해까지의 문학의 흐름을 개괄한 것이고 『개설 조선신문학사』는 개화기 단계에 국한된 것으로, 이들 중 신문학사 방법론이 적용되어 본격적인 문학사 기술 형태를 띠고 있다. 임화는 「신문학사의 방법」에서 신문학사가 추구해야 할 문제를 여섯 가지 항목인‘대상’, ‘토대’, ‘환경’, ‘전통’, ‘양식’, ‘정신’으로 나누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 첫 항목인 ‘대상’에서, 신문학사의 '대상'을 조선의 '근대 문학'으로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문학사(新文學史)의 대상은 물론 조선의 근대 문학이다. 무엇이 조선의 근대문학이냐 하면 물론 근대정신을 내용으로 하고 서구문학의 장르를 형식으로 한 조선의 문학이다.

근대정신을 내용으로 하고 서구문학의 장르를 형식으로 한 조선의 문학을 신문학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위와 같은 임화의 주장은, 곧 ‘신문학=근대문학’, ‘근대문학=서구문학’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임화는 세 번째 항목인 ‘환경’에서 ‘문화 교류’ 내지는 ‘문화적 교섭’이라는 ‘문학적 환경’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문학사=이식문화의 역사’라는 선언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문학사의 연구에 있어 문학적 환경의 고구란 것은 신문학의 생성과 발전에 있어 부단히 영향을 받아온 외국문학의 연구다. 신문학이 서구적인 문학 장르(구체적으로는 자유시와 현대소설)를 채용하면서부터 형성되고, 문학사의 모든 시대가 외국문학의 자극과 영향과 모방으로 일관되었다 하여 과언이 아닐 만큼 신문학사란 이식문화(移植文化)의 역사다. 그런 만치 신문학의 생성과 발전의 각 시대를 통하여 영향받은 제(諸)  외국문학의 연구는 어느 나라의 문학사 상의 그러한 연구보다도 중요성을 띠는 것으로, 그 길의 치묀한 연구는 곧 신문학의 태반(殆半)의 내용을 밝히게 된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학은 서구문학의 이식과 모방 가운데서 자라났다.

‘신문학은 서구문학의 이식과 모방 가운데 자라났다’라는 임화의 주장은 곧 일제 식민사관을 대변하는 논리로 귀착된다. 임화의 주장은 근대화는 서구화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며, 이것은 곧 한국문학의 전통을 단절시키고 그것을 서구문학에 종속시킴으로써 일제강점기 일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일제 근대화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게 한다. 더구나 임화는 『개설 조선신문학사』에서 ‘신문학사의 태반(胎盤)’을 논의하며 “이러한 제조건이 이조 봉건사회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성숙 발전치 못한 것은 불행히 조선 근대사의 기본적 특징이 되었다.”면서 ‘자주적 근대화 조건의 결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내부의 ‘자주적 근대화 조건의 미비’라는 임화의 지적은 곧 일제 식민지배 당국의 관학자의 논리와 동일한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임화의 견해가 조선은 내발적으로 근대 사회로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였으므로 일제의 도움에 의해 그 발전 방향이 이끌어져야 한다는 식민 정책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같은 임화의 주장은 아시아적 정체성론을 펴기도 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도 여겨졌다. 곧 그것은 아시아는 사회 구성이 미비하였기 때문에 역사 발전에서 정체성을 면치 못하였다는 아시아적 정체성론과도 동일한 것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정체성 논란에서 결국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고 있던 임화는 이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에서 봉건적 사회구성체라는 것을 끌어오고 여기에 다시 당시 일본 식민지 지배당국의 관학자들의 조선사에 대한 시각인 조선 사회의 후진 정체성론을 끌어와 접합시킨 것이 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 이식의 대리인으로 ‘이식문화론’을 주장한 사람이 되었다. [1]

백철의 이식문화론

친일문학을 하다가 해방 후 문단 중간파 문학을 자처하면서 제3노선을 걸어왔던 백철

임화의 『개설 조선신문학사』에서 기원한 ‘이식문화론’은 백철의 『신문학사조사』『국문학전사』로 이어지게 된다. 해방 공간에서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극심한 대립과 혼란과는 거리를 두고 문학사 집필에 전념하던 백철은 1948년에 수선사판 『조선신문학사조사』와 1949년 백양당판 『조선신문학사조사 현대편』을 출간하게 된다. 이때 백철은 자신의 문학사적 기술 방법론으로 사조사(思潮史)를 채택한다. 브란데스(M. C. Brandes)의 『서양문학사조사』를 본떠서 기술하였다는 자신의 고백대로, 그의 『조선신문학사조사』는 문예사조적 문학 이해 방식을 한국 근대문학사에 적용한 것이었다. 즉 작품 분석에서 시작한 문학사가 아니라 서구의 사조사적 경향이 한국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추적하는 데서 출발한 문학사였던 것이다. 따라서 백철의 문학사 방법은 서구의 근대 문학사조를 가장 모범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 문학의 사조사적 변이를 추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백철의 입장에서 조선신문학은 당연히 서구의 ‘모방문학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신문학사조사』의 「서설 근대사조와 신문학」에서 백철이 조선의 신문학사를 ‘모방문학사’로 파악함으로써, 그것은 ‘신문학은 서구문학의 이식과 모방 가운데 자라났다’라고 선언한 임화의 시각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또한 백철은 조선은 근대 사조를 받아들일 초입부터 우리 민족사의 후진성으로 그 봉건사가 충분히 발달되지 못하였다는 자신의 아시아적 정체성론을 주장하기 위해, 임화의 논리를 그대로 좇아 자신의 주장에 유리하게 인용함으로써 임화의 ‘이식문화론’을 더 강화시켜 놓기에 이른다. [2]

조연현의 이식문화론

우익 이데올로기의 선봉에 서서 문단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조연현

조연현이 동인지 중심의 문단사 문학사인 『한국현대문학사』를 기술한 것은 1955년 6월부터 1956년 12월까지였다. 그는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인과적 구성이라는 역사적 관계를 해체하고 편년체 연대기적 배열이라는 문학사적 시대 파악 방법론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조연현이 해방 직후 문학가동맹에 대항한 청년문학협의회의 기수였고 이후 문인협회의 중추적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문학적으로 대립하였던 진보사관, 즉 계급주의적 문학사 기술 방법론에서 벗어나 문학을 현실과 분리된 각도에서 해석하려고 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좌익 문학자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 순수문학적 입장을 흑백논리처럼 주장해 오던 조연현은 우익 민족주의 문학 진영이 좌익 계급주의 문학 진영에 의해 어떻게 유린당했고 우리 문학이 어떠한 분열상을 드러내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한국현대문학사』 집필의 목표로 삼게 된다. 더불어 그는 서구 편향적인 입장에 서서 서구적 요소가 한국문학사에 어떻게 수입되고 정착되었는가를 『한국현대문학사』에서 밝히고자 하였다.

우리 韓國에 있어서는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의 近代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韓國의 現代的인 과정도 따지고 보면 구라파의 近代的인 과정을 벗어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韓國의 近代的인 과정은 그 출발과 함께 구라파의 現代的인 과정과 교류되었기 때문에 韓國의 近代史的 과정은 韓國의 現代史的 과정이기도 하다.

한국에는 근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구라파의 근대화 과정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는 조연현의 발언은 곧 서구의 외래 요소에 의해 우리 문학이 발전하였다는 ‘이식문화론’ 또는 ‘모방문학론’의 입장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이로 인해 조연현은 임화와 백철의 계승자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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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