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독립운동, 학문활동 등 다양한 면에서 업적을 남긴 근현대 인물

생애

대한제국 시기

1893년 5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강화학파 이건방(李建芳)을 스승으로 섬겼다.


일제강점기 시기

1910년 일제가 무력으로 한반도를 점령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을 떠났다. 얼마 후 귀국하였다가 1912년 다시 상해로 건너가 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한다. 교포의 정치적·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부인 성씨(成氏)가 갑작스레 죽어 귀국한다. 귀국 후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펼치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다. 이후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협성학교(協成學校)·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였다. 후학을 양성해 민족의 역량을 키우려 힘쓰는 한편, 『동아일보』·『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의 정기를 고무하는 논설을 펴며 민족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1926년 순종이 죽었을 때는 유릉지문(裕陵誌文) 찬술의 일을 맡았다. 불교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에도 출강하였다. 1931년에는 민족의 유산인 고전을 민족사회에 알리고자 다수의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1935년 조선 후기 실학 집대성자인 정약용(丁若鏞) 사후 100주년을 맞아 조선 후기의 실학을 소개하기 위한 학문행사를 주도, 실학연구를 주도하였다. 한편, 이 무렵부터 조선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일련의 양명학자들의 학문을 추적하였고, 1933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연재해 많은 호응을 얻는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강좌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솔을 이끌고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 산중에 은거하였다.


광복 이후

광복이 된 후 서울로 상경.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쓴 조선사가 역사 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조선의 역사를 『5천년 간 조선의 얼』 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연재하였다가 해방 후 1946년 9월 『조선사연구』란 제목으로 간행하였다. 1947년에는 국학의 최고학부를 표방하고 설립된 국학대학(國學大學) 학장에 취임한다.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키려는 각오로 육영사업에 투신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의 간곡한 청으로 신생 조국의 관기(官紀)와 사정(司正)의 중책을 지닌 감찰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정부의 간섭으로 의지를 펼 수 없다고 판단해 미련없이 자리를 사임하였다. 이후 남산동에 은거하며 오로지 국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50년 6·25가 일어났던 그 해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아들 '정양모'의 인터뷰에서 - "남산동에서 6.25를 만난거에요. 거기에서 6.25를 맞았는데 우리는 모르고 비행기가 왔다갔다 하니까 국군 비행기인줄 알고 봤더니 인민군 비행기더라고요. 28일 오후 3시에 수상한 놈이 셋이 왔어요. 여자 하나에 남자 둘. 자기는 북한 정치보위부 특수공작대인데 선생 댁이 넓어서 좀 써야되겠다고. 우리는 군대 따라 내려온 것이 아니고 포항으로 왔대요. 그러니까 납북자로 잡아갈 사람 다 체크해서 그렇게 내려온 거에요. 그들은 우리를 감시하고 며칠 후에 매부가 찾아왔어요. 인천 형무소를 탈출해서 왔는데 사람 눈에 살기가 돌더라고요. 그러더니 아버님께 큰절을 드리고 하는 얘기가 "장인은 우리 인민 정부에 협력하셔야 됩니다. 장인이 절개를 지키는 것은 존경합니다." 그러더니 "그렇지만 우리 인민정부에 협력 안하시는 것은 반동입니다." 그러셨어요.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인민군들이 총을 들고 1개 소대가 집으로 왔어요. 그래서 (우리보고) 나가라고. 그런데 나갈데가 없잖아요.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 가방, 책, 중요한 것 몇 가지하고 아버지 옷가지만 챙겨서 나오셨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근처에서) 동생과 내내 아버지 간호하고 그런데 피고름이 너무 낭자하니까 아버지 옷을 챙겨드리려고(나가신 사이에) 그새에 (아버지를) 잡아갔어요. 어디로 모셔갔냐하면 옛날 국립도서관, 그 지하로 잡아갔어요. 그러더니 잠깐 내무서까지 가자고 하더래요. 그리고 그리고 가더니 고만이에요."

정인보를 이르는 표현

  • 한국의 마지막 강화학파
  • 최후의 양명학자
  •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언론인
  • 전통적인 한문학자
  • 고아한 우리말로 조선의 정한을 담은 시조작가
  • 4대 국경일 노랫말 작사자
  • 동제사 발족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 조선의 마지막 선비
  • 독야청청의 지조인

저서

  • 『조선사연구』저술
  • 『양명학연론』 저술
  • 『담원시조집(薝園時調集)』에 수록
  • 『담원문록(薝園文錄)』에 수록
  • 『담원국학산고(薝園國學散藁)』에 수록
  • 『광복절 노래』작사
  • 『제헌절 노래』작사
  • 『개천절 노래』작사
  • 『새해의 노래』작사
  • 『삼일절』작사
  • 금강산기행문『관동해산록』
  • 기행문 『남유기신』
  • 이 외에도 수필, 서간문을 작성했던 활발한 문예인이었음

경력

  • 동아일보 논설위원
  • 국학대학 학장
  • 대한민국 감찰위원장
  • 전조선문필가협회 회장
  • 연희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 강의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인보 임규, 오세창, 한용운 A는 B와 미륵암에서 놀았다.
정인보 백남운 A와 B는 친구다.

사후

  • 1990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받음.
  • 2001년, 연세대학교에서 민족사관 정립과 국학 진흥에 헌신한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2인문관을 위당관(위당 정인보 선생 기념관)으로 지정.
  • 2008년 8월, 학술지‘한국사 시민강좌’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32명의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로 선정.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인보 위키백과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의 영상

채륜 출판사 블로그

작성자 및 기여자

김윤희 김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