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이광수(李光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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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892年 2月 27日 ~ 1950年 10月 25日 |
출생지 | 평안북도 정주 |
이명 | 호 : 춘원(春園), 장백산인(長白山人) |
대표 저서 | 무정, 허생전, 재생, 마의 태자, 단종애사, 이순신, 흙, 그 여자의 일생, 문사와 수양, 민족개조론, 민족적 경륜 |
이광수(李光洙)
개요
요약
문학 초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대표적인 문인. 일제 말기에 친일 행각으로 인해 한국 근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소설가 외에도 시인, 동아일보 및 독립신문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호는 '춘원(春園)'. 일본식 이름은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1905년 8월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뽑혀 이듬해 일본에 있는 메이지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하게 된다. 이광수는 망명 도중 오산에서 신채호와 만나게 된다. 1911년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자 학감으로 취임해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된다. 그런데 기독교계인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생물 진화론과 톨스토이를 가르친 것이 빌미가 되어 교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와세대 대학에서 공부하며 유학생 잡지 『학지광』을 편집했다. 1918년 북경에서 조선청년독립단 조직에 가담했다. 이후 흥사단에도 가입하였다. 1921년 귀국 이후 국내에서 「허생전」, 「재생」, 「마의 태자」, 「단종애사」, 「이순신」, 「흙」, 「그 여자의 일생」 등의 소설과 「문사와 수양」, 「민족개조론」, 「민족적 경륜」 등의 논설을 써서 발표했다. 1939년에는 친일 문학인들의 모임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이후 줄곧 친일 연설을 하며 전국을 순회했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로 지목되어 곤란을 겪었고, 1949년 반민법에 걸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6·25전쟁 중인 1950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7월 12일 납북된다. 이후 강계에서 30여km 떨어진 산악지대의 강추위 속에서 심한 동상에 걸리고, 건강이 더 악화된다. 이후 북한 만포의 한 병원에 있다가 1950년 10월 25일 생을 마감한다.
학력
저서
참고문헌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안애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