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번째 줄: |
1번째 줄: |
− |
| |
− | == '''인정해조 원문_유민정''' ==
| |
− |
| |
− | 한국 근대 문인 중 한 명인 나혜석 작가는 1896년 4월,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기정]]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 공직에 있으면서 용인군 군수를 역임했기 때문에 나혜석 작가는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 나기정은 아들, 딸을 차별하지 않고 교육 시킨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러나 나기정에게는 몇 명의 첩이 있었는데, 나혜석 작가가 사춘기일 때 그녀보다 한 살 많은 첩을 들이는 것을 보고 정조 관념과 [[축첩제도]], 가부장적 제도에 수많은 의문을 품게 된다. 나혜석 작가는 1910년 8월 제1회 졸업생 4명 중 한 명으로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9월 1일 진명여학교에 편입학한다.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제3회 졸업생 7명 중 최우등으로 졸업했는데, 그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1913년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서향화를 공부하며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일본 체류 중 오빠 나경석의 친구인 [[최승구]]를 만나 연애하게 된다. 그리고 1918년 3월 사립 여자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2월 8일 [[2·8 독립 선언]]에 참석하고, [[3·25 이화학당 학생 만세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면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는다. 그때 변호사 [[김우영]]이 나혜석의 변론을 맡아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1920년 4월 10일, 자신의 4가지 요구 사항을 수용해준 김우영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일본 외무성]]이 주는 특별 포상인 해외 위로 여행 대상자가 된 남편 김우영과 함께 세계일주여행에 올랐다. 유럽과 미국 등지의 여행은 나혜석 작가의 사상과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고, 1920년대 후반에는 파리에 체류하여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파리에 외교관으로 주재하고 있던 최린과 [[염문설]]이 돌았고, 귀국 후 시집살이와 가난에 시달리다 [[최린]]과 불륜을 저질러 김우영과 이혼하였다. 최린을 정조 유린이라는 명목으로 고소하였다가 패소하고, ‘이혼고백서’로 인해 사회로부터 큰 비판을 받아서 마땅한 벌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가족들과도 제대로 된 교류를 하지 못하고 살다가 결국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였다.
| |
− | 나혜석 작가의 작품에는 여성과 사회 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들어있다. 그녀는 국내 첫 [[페미니즘 문학]]으로 평가되는 <[[경희]]>에서 주인공은 여자도 왜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지를 [[봉건적]] 여성의 삶의 모순을 통해 보여준다. 이 뿐만 아니라, 글과 그림으로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해주어야 함을 거듭 주장하였다. 조선시대 여성은 [[삼종지의(三從之義)]]라고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가부장적 도리에 따라 살았는데,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혼고백서]]>에서 당시 금기시되어 있던 여성의 성욕을 거론했으며, 자신들은 정조를 지키지 않으면서 여성들에게만 요구하는 남성들의 이중성을 비판했다. <[[구미유기]]>에서는 영국의 참정권 운동을 소개하면서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리면서 [[개화파]]의 실패 이후 참정권에 거부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을 향해,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민주주의와 참정권의 당위성을 말하였다. 또한 <[[모된 감상기]]>에서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묘사된 분만 시의 고통을 솔직하게 토로하며 여성의 육체에 대한 언급을 기피하는 금기를 깨뜨렸다.
| |
− | 나혜석 작가는 다른 작가들이 차마 언급하지 못했던 여성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과 환상을, 사회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차게 비판하였다. 다만 그것을 화려한 문체와 뛰어난 글솜씨로 표현했으므로 마땅히 문학인으로서 존경할만한 인물이다. <[[경희]]>가 그 예가 된다. 문화포털에서는 <[[경희]]>에서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통해 1910년대 일본 여자 유학생의 갈등과 고뇌가 자세히 그려져 있어 소재적인 가치도 있는 작품이라고 하면서, 문제 제기와 갈등 해결의 현실성과 인물 묘사의 생생함에서 1910년대 단편소설 중 가장 우수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말하니 나혜석이 문학에 대한 충분한 재능을 갖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
| | | |
| ===단어=== | | ===단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