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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품 제목||작품 발표지||작품 출간시기||작품 유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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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理想的이상적 夫人부인」||『學之光』학지광||1914. 12||여성비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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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雜感잡감」||『學之光』학지광||1917. 03||여성비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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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雜感잡감-K언니에게 與여(주다)」||『學之光』학지광||1917. 07||여성비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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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夫婦부부」||『女子界』여자계 1호||1917(미발굴)||단편소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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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희」||『女子界』여자계 2호||1918. 03||단편소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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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광||『女子界』여자계||1918. 03||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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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回生회생한 孫女손녀에게」||『女子界』여자계 3호||1918. 09||단편소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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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四年4년前전의日記일기中중에서」||『신여자』||1920. 06||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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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인문제의 일단」||『曙光』서광||1920. 07||여성비평(미확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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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繪畵회화와 朝鮮조선 女子여자-新進신진(새로 나서다) 女流여유의 氣焰기염」||『東亞日報』동이일보||1921. 02. 26||미술에세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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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洋畵양화(바다 그림) 展覽전람(펼쳐 봄)에 對대야」||『每日申報』매일신보||1921. 03. 17||미술에세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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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人形인형의 家가」||『每日申報』매일신보||1921. 04. 03||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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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물」||『廢墟』폐허 제2호||1921. 04||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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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砂사(모래)」||『廢墟』폐허 제2호||1921. 04||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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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閨怨규원(버림받은 부녀의 원한)」||『新家庭』신가정||1927. 07||단편소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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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婦人부인衣服의복改良개량問題문제-金元周김원주兄형의意見의견에對대하야」||『東亞日報』동이일보||1921. 09. 29 ~ 10. 01||여성비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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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라」||『노라』(영창서관)||1922. 06||노래가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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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母모된感想記감상기」||『東明』동명||1923. 01. 01. ~ 21||페미니스트 산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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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百結生백결생에게答답함」||『東明』동명||1923. 03. 18||여성비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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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인』의 탄생을 축하하여」||『婦人』부인||1923. 04||여성비평(미확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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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康明花강명화의 自殺자살에 對대하야||『東亞日報』동이일보||1923. 07. 08||여성비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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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夫妻間부처간의 問答문답||『新女性』신여성||1923. 11||페미니스트 산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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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주의 녀름」||『新女性』신여성||1924. 07||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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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一年1생만에 본 京城경성의 雜感잡감(온갖 감성)」||『開闢』개벽||1924. 07||수필 | ||
+ | |- | ||
+ | |「나를 잇지 안는 幸福행복」||『新女性』신여성||1924. 08||페미니스트 산문 | ||
+ | |- | ||
+ |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朝鮮日報』조선일보||1926. 01. 03||수필 | ||
+ | |- | ||
+ | |「생활 개량에 대한 녀자의 부르지짐」||『東亞日報』동이일보||1926. 01. 24 ~ 30||페미니스트 산문 | ||
+ | |- | ||
+ | |「怨恨원한」||『朝鮮文壇』조선문단||1926. 04||단편소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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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展미전 出品출품 製作제작 中중에」||『朝鮮日報』조선일보||1926. 05. 20 ~ 23||미술에세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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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남편은 이러하외다」||『新女性』신여성||1926. 06||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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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國중국과 朝鮮조선의 國境국경」||『時代日報』시대일보||1926. 06. 06||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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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京城경성 온 感想감상 一片일편」||『東亞日報』동이일보||1927. 05. 27||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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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가의 생활」||『青年』청년||1927. 06 ||(미확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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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오 秋溪추계에게」||『朝鮮日報』조선일보||1927. 07. 28||구미여행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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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愛兒病看護애아(사랑하는 아이)병간호」||『三千里』삼천리||1930. 01||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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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佛蘭西불란서(프랑스) 家庭가정은 얼마나 다를가」||『東亞日報』동이일보||1930. 03. 28 ~ 04. 02||구미유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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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歐米구미 시찰긔」||『東亞日報』동이일보||1930. 04. 03 ~ 10||구미여행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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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끽연실」||『三千里』삼천리||1930. 05||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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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巴里파리에서 본 것 늣긴 것-사람이냐? 학문이냐?」||『大潮』대조||1930. 06, 07 합병호||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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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名流명유 婦人부인과 産兒制限산아제한」||『三千里』삼천리||1930. 08||설문응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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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夫婦부부」||『太朝』태조||1930. 09||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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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잇지안는 幸福행복(帝展入選後感想제전입선후감상)」||『三千里』삼천리||1931. 11||페미니스트 산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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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아 自由자유의 巴里파리가 그리워-歐米漫遊구미만유하고 온 後후의 나」||『三千里』삼천리||1932. 01||페미니스트 산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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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巴里파리의 모델과 畵家生活화가생활」||『三千里』삼천리||1932. 03||미술에세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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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巴里畵家生活파리화가생활」||『三千里』삼천리||1932. 04||미술에세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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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데팬당式식이다-설문·混迷低調혼미저조의 朝鮮美術展覽會조선미술전님회를 批判비판함」||『東光』동광||1932. 07||설문응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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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美術展覽會조선미술전남회-西洋畵總評서양화총평」||『三千里』삼천리||1932. 07. 01||미술비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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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쏘비엣 露西亞行노서아행」||『三千里』삼천리||1932. 12||구미유기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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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畵家화가로 어머니로-나의 十年間10년간 生活생활」||『新東亞』신동아||1933. 01||페미니스트 산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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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伯林백림의 그 새벽」||『新家庭』신가정||1933. 01||구미여행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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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CCP」||『三千里』삼천리||1933. 02||구미유기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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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델-女人日記여인일기」||『朝鮮日報』조선일보||1933. 02. 28||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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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伯林백림과 巴里파리」||『三千里』삼천리||1933. 03||구미유기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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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망스런 봄밤」||『新東亞』신동아||1933. 04||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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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 巴里行파리행」||『三千里』삼천리||1933. 05||구미유기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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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展미전의 印象인상」||『每日申報』매일신보||1933. 05. 16 ~ 21||미술비평 | ||
+ | |- | ||
+ | |「巴里파리의 어머니날」||『新家庭』신가정||1933. 05||구미여행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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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伯林백림에서 倫敦윤돈(런던)지」||『三千里』삼천리||1933. 09||구미유기 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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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필로 쓴 편지」||『新東亞』신동아||1933. 10||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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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西洋서양 藝術예술과 裸體美나체미」||『三千里』삼천리||1933. 12||구미유기 6 | ||
+ | |- | ||
+ | |『김명애』||미간행||1933. 12||장편소설(원고일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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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떡 먹은 이야기」||『朝鮮中央日報』조선중앙일보||1934. 01. 14||콩트 | ||
+ | |- | ||
+ | |「밤거리의 祝賀式축하식(歐구)」||『中央』중앙||1934. 02||구미여행기 | ||
+ | |- | ||
+ | |「多情다정하고 實質的실질적인 佛蘭西불란서(프랑스) 婦人부인-歐米구미 婦人부인의 敎養교양잇는 家庭生活가정생활」||『中央』중앙||1934. 03||구미여행기 | ||
+ | |- | ||
+ | |「영원히 이저주시오」||『月刊海新』월간해신||1934. 03||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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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조선에 태어난 것을 행복으로 압니다」||『三千里』삼천리||1934. 05||설문응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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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情熱정열의 西班牙行서반아행」||『三千里』삼천리||1934. 05||구미유기 7 | ||
+ | |- | ||
+ | |「날러간 靑鳥청조(파랑새)-연애와 결혼문제」||『中央』중앙||1934. 05||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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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女人여인 獨居記독거기(혼자 사는 기록)」||『三千里』삼천리||1934. 07||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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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巴里파리에서 紐育뉴욕으로」||『三千里』삼천리||1934. 07||구미유기 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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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서울 여시장이 된다면」||『三千里』삼천리||1934. 07||설문응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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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哀話애화 叢石亭海邊총석정해변」||『月刊每申』월간매신||1934. 08||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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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離婚이혼 告白狀고백상-靑邱氏청구씨에게」||『三千里』삼천리||1934. 08 ~ 09||페미니스트 산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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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太平洋태평양 건너서(故國고국으로)」||『三千里』삼천리||1934. 09||구미유기 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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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伊太利이태리 美術館미술관」||『三千里』삼천리||1934. 11||구미여행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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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伊太利이태리 美術紀行미술기행」||『三千里』삼천리||1935. 02||구미여행기 | ||
+ | |- | ||
+ | |「新生活신생활에 들면서」||『三千里』삼천리||1935. 02||페미니스트 산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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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앗겨 무엇하리, 靑春청춘을」||『三千里』삼천리||1935. 03||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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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羅女史나여사의 書翰서한」||『三千里』삼천리||1935. 03||미술관계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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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歐米구미(유럽+미국) 女性여성을 보고 半島반도 女性여성에게」||『三千里』삼천리||1935. 06||여성비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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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異性間이성간의 友靑論우청론-아름다운 男妹남매의 記기」||『三千里』삼천리||1935. 06||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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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여교원 시대」||『三千里』삼천리||1935. 07||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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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獨身女性독신여성의 貞操論정조론」||『三千里』삼천리||1935. 10||여성비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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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巴里파리의 그 女子여자」||『三千里』삼천리||1935. 11||희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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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英米영미 婦人부인 參政權참정권 運動者운동자 會見記회견기」||『三千里』삼천리||1936. 01||여성비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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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倫敦윤돈(런던의 음역어) 救世軍구세군(기독교의 한 파) 託兒所탁아소(아동복지시설)를 尋訪심방하고」||『三千里』삼천리||1936. 04||여성비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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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佛蘭西불란서(프랑스) 家庭가정은 얼마나 다를가」||『三千里』삼천리||1936. 04||구미여행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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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玄淑현숙(겁고 맑은)」||『三千里』삼천리||1936. 12||단편소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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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정에 우노라······」||『三千里』삼천리||1937. 04||(미발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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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東京女子美術學校時代동경여자미술학교시대」||『三千里』삼천리||1937. 05||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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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靈영(영혼)이냐, 肉육(육체)이냐, 靈肉영육이냐, 靈肉영육이 合합(+)한 戀愛연애라야한다」||『三千里』삼천리||1937. 12||여성비평 | ||
+ | |- | ||
+ | |「海印寺해인사의 風光풍광」||『三千里』삼천리||1938. 08||수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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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작품'''== | =='''대표 작품'''== |
2022년 6월 2일 (목) 04:56 판
나혜석 | |
---|---|
이름 | 나혜석 |
출샐 | 1896년 4월 28일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 (現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신풍동) |
사망 | 1948년 12월 10일 (향년 52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자유시 용산구 원효로1가 서울시립자혜원 무연고자 병동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89길 24 |
이명 | 나아지 (羅兒只), 나명순 (羅明順) |
직업 | 화가, 작가, 시인, 언론인, 독립 운동가, 사회 운동가. 여성 운동가 |
학력 | 삼일여학교(1910년 입학),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1913년 졸업), 여자미술전문학교(졸업) |
배우자 | 배우자 김우영 |
자녀 | 장녀 김나열 장남 김선 차남 김진 삼남 김건 |
부모 | 아버지 나기정 |
형제 | 큰오빠 나홍석 작은오빠 나경석 |
목차
생애
작품 세계
문학사적 의의
작품
그림
저작
작품 제목 | 작품 발표지 | 작품 출간시기 | 작품 유형 |
---|---|---|---|
「理想的이상적 夫人부인」 | 『學之光』학지광 | 1914. 12 | 여성비평 |
「雜感잡감」 | 『學之光』학지광 | 1917. 03 | 여성비평 |
「雜感잡감-K언니에게 與여(주다)」 | 『學之光』학지광 | 1917. 07 | 여성비평 |
「夫婦부부」 | 『女子界』여자계 1호 | 1917(미발굴) | 단편소설 |
「경희」 | 『女子界』여자계 2호 | 1918. 03 | 단편소설 |
「光」광 | 『女子界』여자계 | 1918. 03 | 시 |
「回生회생한 孫女손녀에게」 | 『女子界』여자계 3호 | 1918. 09 | 단편소설 |
「四年4년前전의日記일기中중에서」 | 『신여자』 | 1920. 06 | 수필 |
「부인문제의 일단」 | 『曙光』서광 | 1920. 07 | 여성비평(미확인) |
「繪畵회화와 朝鮮조선 女子여자-新進신진(새로 나서다) 女流여유의 氣焰기염」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21. 02. 26 | 미술에세이 |
「洋畵양화(바다 그림) 展覽전람(펼쳐 봄)에 對대야」 | 『每日申報』매일신보 | 1921. 03. 17 | 미술에세이 |
「人形인형의 家가」 | 『每日申報』매일신보 | 1921. 04. 03 | 시 |
「내물」 | 『廢墟』폐허 제2호 | 1921. 04 | 시 |
「砂사(모래)」 | 『廢墟』폐허 제2호 | 1921. 04 | 시 |
「閨怨규원(버림받은 부녀의 원한)」 | 『新家庭』신가정 | 1927. 07 | 단편소설 |
「婦人부인衣服의복改良개량問題문제-金元周김원주兄형의意見의견에對대하야」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21. 09. 29 ~ 10. 01 | 여성비평 |
「노라」 | 『노라』(영창서관) | 1922. 06 | 노래가사 |
「母모된感想記감상기」 | 『東明』동명 | 1923. 01. 01. ~ 21 | 페미니스트 산문 |
「百結生백결생에게答답함」 | 『東明』동명 | 1923. 03. 18 | 여성비평 |
「『부인』의 탄생을 축하하여」 | 『婦人』부인 | 1923. 04 | 여성비평(미확인) |
康明花강명화의 自殺자살에 對대하야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23. 07. 08 | 여성비평 |
夫妻間부처간의 問答문답 | 『新女性』신여성 | 1923. 11 | 페미니스트 산문 |
「만주의 녀름」 | 『新女性』신여성 | 1924. 07 | 수필 |
「一年1생만에 본 京城경성의 雜感잡감(온갖 감성)」 | 『開闢』개벽 | 1924. 07 | 수필 |
「나를 잇지 안는 幸福행복」 | 『新女性』신여성 | 1924. 08 | 페미니스트 산문 |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 | 『朝鮮日報』조선일보 | 1926. 01. 03 | 수필 |
「생활 개량에 대한 녀자의 부르지짐」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26. 01. 24 ~ 30 | 페미니스트 산문 |
「怨恨원한」 | 『朝鮮文壇』조선문단 | 1926. 04 | 단편소설 |
「美展미전 出品출품 製作제작 中중에」 | 『朝鮮日報』조선일보 | 1926. 05. 20 ~ 23 | 미술에세이 |
「내 남편은 이러하외다」 | 『新女性』신여성 | 1926. 06 | 수필 |
「中國중국과 朝鮮조선의 國境국경」 | 『時代日報』시대일보 | 1926. 06. 06 | 시 |
「京城경성 온 感想감상 一片일편」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27. 05. 27 | 수필 |
「예술가의 생활」 | 『青年』청년 | 1927. 06 | (미확인) |
「아오 秋溪추계에게」 | 『朝鮮日報』조선일보 | 1927. 07. 28 | 구미여행기 |
「愛兒病看護애아(사랑하는 아이)병간호」 | 『三千里』삼천리 | 1930. 01 | 수필 |
「佛蘭西불란서(프랑스) 家庭가정은 얼마나 다를가」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30. 03. 28 ~ 04. 02 | 구미유기 |
「歐米구미 시찰긔」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30. 04. 03 ~ 10 | 구미여행기 |
「끽연실」 | 『三千里』삼천리 | 1930. 05 | 수필 |
「巴里파리에서 본 것 늣긴 것-사람이냐? 학문이냐?」 | 『大潮』대조 | 1930. 06, 07 합병호 | 수필 |
「名流명유 婦人부인과 産兒制限산아제한」 | 『三千里』삼천리 | 1930. 08 | 설문응답 |
「젊은 夫婦부부」 | 『太朝』태조 | 1930. 09 | 수필 |
「나를 잇지안는 幸福행복(帝展入選後感想제전입선후감상)」 | 『三千里』삼천리 | 1931. 11 | 페미니스트 산문 |
「아아 自由자유의 巴里파리가 그리워-歐米漫遊구미만유하고 온 後후의 나」 | 『三千里』삼천리 | 1932. 01 | 페미니스트 산문 |
「巴里파리의 모델과 畵家生活화가생활」 | 『三千里』삼천리 | 1932. 03 | 미술에세이 |
「巴里畵家生活파리화가생활」 | 『三千里』삼천리 | 1932. 04 | 미술에세이 |
「안데팬당式식이다-설문·混迷低調혼미저조의 朝鮮美術展覽會조선미술전님회를 批判비판함」 | 『東光』동광 | 1932. 07 | 설문응답 |
「朝鮮美術展覽會조선미술전남회-西洋畵總評서양화총평」 | 『三千里』삼천리 | 1932. 07. 01 | 미술비평 |
「쏘비엣 露西亞行노서아행」 | 『三千里』삼천리 | 1932. 12 | 구미유기 1 |
「畵家화가로 어머니로-나의 十年間10년간 生活생활」 | 『新東亞』신동아 | 1933. 01 | 페미니스트 산문 |
「伯林백림의 그 새벽」 | 『新家庭』신가정 | 1933. 01 | 구미여행기 |
「CCCP」 | 『三千里』삼천리 | 1933. 02 | 구미유기 2 |
「모델-女人日記여인일기」 | 『朝鮮日報』조선일보 | 1933. 02. 28 | 수필 |
「伯林백림과 巴里파리」 | 『三千里』삼천리 | 1933. 03 | 구미유기 3 |
「원망스런 봄밤」 | 『新東亞』신동아 | 1933. 04 | 수필 |
「의 巴里行파리행」 | 『三千里』삼천리 | 1933. 05 | 구미유기 4 |
「美展미전의 印象인상」 | 『每日申報』매일신보 | 1933. 05. 16 ~ 21 | 미술비평 |
「巴里파리의 어머니날」 | 『新家庭』신가정 | 1933. 05 | 구미여행기 |
「伯林백림에서 倫敦윤돈(런던)지」 | 『三千里』삼천리 | 1933. 09 | 구미유기 5 |
「연필로 쓴 편지」 | 『新東亞』신동아 | 1933. 10 | 수필 |
「西洋서양 藝術예술과 裸體美나체미」 | 『三千里』삼천리 | 1933. 12 | 구미유기 6 |
『김명애』 | 미간행 | 1933. 12 | 장편소설(원고일실) |
「떡 먹은 이야기」 | 『朝鮮中央日報』조선중앙일보 | 1934. 01. 14 | 콩트 |
「밤거리의 祝賀式축하식(歐구)」 | 『中央』중앙 | 1934. 02 | 구미여행기 |
「多情다정하고 實質的실질적인 佛蘭西불란서(프랑스) 婦人부인-歐米구미 婦人부인의 敎養교양잇는 家庭生活가정생활」 | 『中央』중앙 | 1934. 03 | 구미여행기 |
「영원히 이저주시오」 | 『月刊海新』월간해신 | 1934. 03 | 수필 |
「朝鮮조선에 태어난 것을 행복으로 압니다」 | 『三千里』삼천리 | 1934. 05 | 설문응답 |
「情熱정열의 西班牙行서반아행」 | 『三千里』삼천리 | 1934. 05 | 구미유기 7 |
「날러간 靑鳥청조(파랑새)-연애와 결혼문제」 | 『中央』중앙 | 1934. 05 | 수필 |
「女人여인 獨居記독거기(혼자 사는 기록)」 | 『三千里』삼천리 | 1934. 07 | 수필 |
「巴里파리에서 紐育뉴욕으로」 | 『三千里』삼천리 | 1934. 07 | 구미유기 8 |
「내가 서울 여시장이 된다면」 | 『三千里』삼천리 | 1934. 07 | 설문응답 |
「哀話애화 叢石亭海邊총석정해변」 | 『月刊每申』월간매신 | 1934. 08 | 수필 |
「離婚이혼 告白狀고백상-靑邱氏청구씨에게」 | 『三千里』삼천리 | 1934. 08 ~ 09 | 페미니스트 산문 |
「太平洋태평양 건너서(故國고국으로)」 | 『三千里』삼천리 | 1934. 09 | 구미유기 9 |
「伊太利이태리 美術館미술관」 | 『三千里』삼천리 | 1934. 11 | 구미여행기 |
「伊太利이태리 美術紀行미술기행」 | 『三千里』삼천리 | 1935. 02 | 구미여행기 |
「新生活신생활에 들면서」 | 『三千里』삼천리 | 1935. 02 | 페미니스트 산문 |
「앗겨 무엇하리, 靑春청춘을」 | 『三千里』삼천리 | 1935. 03 | 시 |
「羅女史나여사의 書翰서한」 | 『三千里』삼천리 | 1935. 03 | 미술관계편지 |
「歐米구미(유럽+미국) 女性여성을 보고 半島반도 女性여성에게」 | 『三千里』삼천리 | 1935. 06 | 여성비평 |
「異性間이성간의 友靑論우청론-아름다운 男妹남매의 記기」 | 『三千里』삼천리 | 1935. 06 | 수필 |
「나의 여교원 시대」 | 『三千里』삼천리 | 1935. 07 | 수필 |
「獨身女性독신여성의 貞操論정조론」 | 『三千里』삼천리 | 1935. 10 | 여성비평 |
「巴里파리의 그 女子여자」 | 『三千里』삼천리 | 1935. 11 | 희곡 |
「英米영미 婦人부인 參政權참정권 運動者운동자 會見記회견기」 | 『三千里』삼천리 | 1936. 01 | 여성비평 |
「倫敦윤돈(런던의 음역어) 救世軍구세군(기독교의 한 파) 託兒所탁아소(아동복지시설)를 尋訪심방하고」 | 『三千里』삼천리 | 1936. 04 | 여성비평 |
「佛蘭西불란서(프랑스) 家庭가정은 얼마나 다를가」 | 『三千里』삼천리 | 1936. 04 | 구미여행기 |
「玄淑현숙(겁고 맑은)」 | 『三千里』삼천리 | 1936. 12 | 단편소설 |
「애정에 우노라······」 | 『三千里』삼천리 | 1937. 04 | (미발굴) |
「나의 東京女子美術學校時代동경여자미술학교시대」 | 『三千里』삼천리 | 1937. 05 | 수필 |
「靈영(영혼)이냐, 肉육(육체)이냐, 靈肉영육이냐, 靈肉영육이 合합(+)한 戀愛연애라야한다」 | 『三千里』삼천리 | 1937. 12 | 여성비평 |
「海印寺해인사의 風光풍광」 | 『三千里』삼천리 | 1938. 08 | 수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