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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일 (목) 05:53 판
나혜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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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나혜석 |
출샐 | 1896년 4월 28일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 (現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신풍동) |
사망 | 1948년 12월 10일 (향년 52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자유시 용산구 원효로1가 서울시립자혜원 무연고자 병동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89길 24 |
이명 | 나아지 (羅兒只), 나명순 (羅明順) |
직업 | 화가, 작가, 시인, 언론인, 독립 운동가, 사회 운동가. 여성 운동가 |
학력 | 삼일여학교(1910년 입학),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1913년 졸업), 여자미술전문학교(졸업) |
배우자 | 배우자 김우영 |
자녀 | 장녀 김나열 장남 김선 차남 김진 삼남 김건 |
부모 | 아버지 나기정 |
형제 | 큰오빠 나홍석 작은오빠 나경석 |
목차
생애
작품 세계
문학사적 의의
작품
그림
작품 제목 | 작품 출간 시기 | 작품 유형 | 작품 참고 사항 |
---|---|---|---|
<농가> | 1922 | 선적도록 유채 | 제1회 입선 |
<春춘(봄)이 오다> | 1922 | 선적도록 유채 | 제1회 입선 |
<滿洲만주 봉천 풍경> | 캔버스에 유채 27*39 | 개인소장 | |
<농촌 風景풍경> | 1923 | 합판에 유채 23.5*32.5 | 개인소장 |
<봉황산> | 1923 | 선적도록 유채 | 제2회 입선 |
<봉황성의 남문> | 1923 | 선적도록 유채 | 제2회 4등 입상 개인 소장 |
<秋추(가을)의 庭정(뜰)> | 1924 | 선적도록 유채 | 제3회 4등 입상 |
<初夏초하(초여름)의 오전> | 1924 | 선적도록 유채 | 제3회 입선 |
<娘娘廟낭랑묘> | 1925 | 선적도록 유채 | 제4회 3등 입상 |
<天后宮천후궁> | 1926 | 선적도록 유채 | 제5회 특선 |
<支那町지나정> | 1926 | 선적도록 유채 | 제5회 입선 |
<봄의 오후> | 1927 | 선적도록 유채 | 제6회 무감사 입선 |
<金雨英김우영 초상> | 1927 | 유채 | 개인소장 |
<裸婦나부(벌거벗은 아내) 습작> | 1927 | 유화 | |
<舞姬무희> | 1927~1928 | 캔버스에 유채 39*33.5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파리 風景풍경> | 1927~1928 | 목판에 유채 23*33 | 개인소장 |
<스페인 國境국경> | 1928 | 목판에 유채 23.5*33 | 개인소장 |
<불란서(프랑스) 마을 풍경> | 1928 | 유채 30*5.5 | 개인소장 |
<스페인 해수욕장> | 1928 | 캔버스에 유채 32.5*43 | 개인소장 |
<仁川인천風景풍경> | 합판에 유채 15*22 | 개인소장 | |
<自畵像자화상> | 1928 | 캔버스에 유채 65*50 | 개인소장 |
<녹동 풍경> | 1929~1930 | 유채 | 개인소장 |
<어린이들> | 1930 | 선적도록 유채 | 제9회 입선 |
<畵家村화가촌> | 1930 | 선적도록 유채 | 제9회 입선 |
<裸婦나부> | 1931 | 선적도록 유채 | 제10회 입선 |
<庭園정원> | 1931 | 선적도록 유채 | 제10회 특선, 제12회 제전 입선 |
<芍藥작약> | 1931 | 선적도록 유채 | 제10회 입선 |
<소녀> | 1932 | 선적도록 유채 | 제11회 무감사 입선 |
<창가에서> | 1932 | 선적도록 유채 | 제11회 무감사 입선 |
<金剛山금강산萬相亭만상정> | 1932 | 선적도록 유채 | 제11회 무감사 입선 |
<善竹橋선죽교> | 1933 | 목판에 유채 23*33 | 개인소장 |
<다솔사> | 합판에 유채 54*69 | 개인소장 | |
<화령전 작약> | 1934 | 목판에 유채 34*23 | 리움삼성미술관 |
<水原수원 西湖서호(서쪽 호수)> | 1934 | 목판에 유채 30*39 | 개인소장 |
<별장> | 1935 | 목판에 유채 22.5*33 | 개인소장 |
<海印寺해인사 石塔석탑> | 1938 즈음 | 합판에 유채 32*33 | 개인소장 |
<불란서 교외 풍경> | 캔버스에 유채 8호 | 개인소장 | |
<早朝조조> | 1920. 01 | 판화 | 『공제』 |
<개척자> | 1921. 07 | 판화 | 『開闢』개벽 13호 |
<저것이 무엇인고> | 1920. 04 | 만화 | 『신여자』 |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 | 1920. 06 | 만화 | 『신여자』 |
<廉想涉염상섭(1897~1963) 작품집> | 1924 | 표지화 | 『견우화』 |
<섣달대목> | 1919. 01. 21 | 만필 | 『每日申報』매일신보 |
<섣달대목> | 1919. 01 30 | 만필 | 『每日申報』매일신보 |
<섣달대목> | 1919. 02 01 | 만필 | 『每日申報』매일신보 |
<초하룻날> | 1919. 02. 02 | 만필 | 『每日申報』매일신보 |
<초하룻날> | 1919. 02. 03 | 만필 | 『每日申報』매일신보 |
<초하룻날> | 1919. 02. 04 | 만필 | 『每日申報』매일신보 |
<초하룻날> | 1919. 02. 06 | 만필 | 『每日申報』매일신보 |
<초하룻날> | 1919. 02. 07 | 만필 | 『每日申報』매일신보 |
<경성역에서>, <전동식당에서> | 1932(?) | 만필 | |
<계명구락부에서> | 만필 | ||
<총석정 어촌에서> | 1932 | 만필 | |
<인형의 家가> | 1921. 03. 02 ~ 05 | 삽화 | 『每日申報』매일신보 |
<이상을 지시하는 계명자> | 1932. 12 | 삽화 | 『계명』 |
저작
작품 제목 | 작품 발표지 | 작품 출간시기 | 작품 유형 |
---|---|---|---|
「理想的이상적 夫人부인」 | 『學之光』학지광 | 1914. 12 | 여성비평 |
「雜感잡감」 | 『學之光』학지광 | 1917. 03 | 여성비평 |
「雜感잡감-K언니에게 與여(주다)」 | 『學之光』학지광 | 1917. 07 | 여성비평 |
「夫婦부부」 | 『女子界』여자계 1호 | 1917(미발굴) | 단편소설 |
「경희」 | 『女子界』여자계 2호 | 1918. 03 | 단편소설 |
「光」광 | 『女子界』여자계 | 1918. 03 | 시 |
「回生회생한 孫女손녀에게」 | 『女子界』여자계 3호 | 1918. 09 | 단편소설 |
「四年4년前전의日記일기中중에서」 | 『신여자』 | 1920. 06 | 수필 |
「부인문제의 일단」 | 『曙光』서광 | 1920. 07 | 여성비평(미확인) |
「繪畵회화와 朝鮮조선 女子여자-新進신진(새로 나서다) 女流여유의 氣焰기염」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21. 02. 26 | 미술에세이 |
「洋畵양화(바다 그림) 展覽전람(펼쳐 봄)에 對대야」 | 『每日申報』매일신보 | 1921. 03. 17 | 미술에세이 |
「人形인형의 家가」 | 『每日申報』매일신보 | 1921. 04. 03 | 시 |
「내물」 | 『廢墟』폐허 제2호 | 1921. 04 | 시 |
「砂사(모래)」 | 『廢墟』폐허 제2호 | 1921. 04 | 시 |
「閨怨규원(버림받은 부녀의 원한)」 | 『新家庭』신가정 | 1927. 07 | 단편소설 |
「婦人부인衣服의복改良개량問題문제-金元周김원주兄형의意見의견에對대하야」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21. 09. 29 ~ 10. 01 | 여성비평 |
「노라」 | 『노라』(영창서관) | 1922. 06 | 노래가사 |
「母모된感想記감상기」 | 『東明』동명 | 1923. 01. 01. ~ 21 | 페미니스트 산문 |
「百結生백결생에게答답함」 | 『東明』동명 | 1923. 03. 18 | 여성비평 |
「『부인』의 탄생을 축하하여」 | 『婦人』부인 | 1923. 04 | 여성비평(미확인) |
康明花강명화의 自殺자살에 對대하야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23. 07. 08 | 여성비평 |
夫妻間부처간의 問答문답 | 『新女性』신여성 | 1923. 11 | 페미니스트 산문 |
「만주의 녀름」 | 『新女性』신여성 | 1924. 07 | 수필 |
「一年1생만에 본 京城경성의 雜感잡감(온갖 감성)」 | 『開闢』개벽 | 1924. 07 | 수필 |
「나를 잇지 안는 幸福행복」 | 『新女性』신여성 | 1924. 08 | 페미니스트 산문 |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 | 『朝鮮日報』조선일보 | 1926. 01. 03 | 수필 |
「생활 개량에 대한 녀자의 부르지짐」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26. 01. 24 ~ 30 | 페미니스트 산문 |
「怨恨원한」 | 『朝鮮文壇』조선문단 | 1926. 04 | 단편소설 |
「美展미전 出品출품 製作제작 中중에」 | 『朝鮮日報』조선일보 | 1926. 05. 20 ~ 23 | 미술에세이 |
「내 남편은 이러하외다」 | 『新女性』신여성 | 1926. 06 | 수필 |
「中國중국과 朝鮮조선의 國境국경」 | 『時代日報』시대일보 | 1926. 06. 06 | 시 |
「京城경성 온 感想감상 一片일편」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27. 05. 27 | 수필 |
「예술가의 생활」 | 『青年』청년 | 1927. 06 | (미확인) |
「아오 秋溪추계에게」 | 『朝鮮日報』조선일보 | 1927. 07. 28 | 구미여행기 |
「愛兒病看護애아(사랑하는 아이)병간호」 | 『三千里』삼천리 | 1930. 01 | 수필 |
「佛蘭西불란서(프랑스) 家庭가정은 얼마나 다를가」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30. 03. 28 ~ 04. 02 | 구미유기 |
「歐米구미 시찰긔」 | 『東亞日報』동이일보 | 1930. 04. 03 ~ 10 | 구미여행기 |
「끽연실」 | 『三千里』삼천리 | 1930. 05 | 수필 |
「巴里파리에서 본 것 늣긴 것-사람이냐? 학문이냐?」 | 『大潮』대조 | 1930. 06, 07 합병호 | 수필 |
「名流명유 婦人부인과 産兒制限산아제한」 | 『三千里』삼천리 | 1930. 08 | 설문응답 |
「젊은 夫婦부부」 | 『太朝』태조 | 1930. 09 | 수필 |
「나를 잇지안는 幸福행복(帝展入選後感想제전입선후감상)」 | 『三千里』삼천리 | 1931. 11 | 페미니스트 산문 |
「아아 自由자유의 巴里파리가 그리워-歐米漫遊구미만유하고 온 後후의 나」 | 『三千里』삼천리 | 1932. 01 | 페미니스트 산문 |
「巴里파리의 모델과 畵家生活화가생활」 | 『三千里』삼천리 | 1932. 03 | 미술에세이 |
「巴里畵家生活파리화가생활」 | 『三千里』삼천리 | 1932. 04 | 미술에세이 |
「안데팬당式식이다-설문·混迷低調혼미저조의 朝鮮美術展覽會조선미술전님회를 批判비판함」 | 『東光』동광 | 1932. 07 | 설문응답 |
「朝鮮美術展覽會조선미술전남회-西洋畵總評서양화총평」 | 『三千里』삼천리 | 1932. 07. 01 | 미술비평 |
「쏘비엣 露西亞行노서아행」 | 『三千里』삼천리 | 1932. 12 | 구미유기 1 |
「畵家화가로 어머니로-나의 十年間10년간 生活생활」 | 『新東亞』신동아 | 1933. 01 | 페미니스트 산문 |
「伯林백림의 그 새벽」 | 『新家庭』신가정 | 1933. 01 | 구미여행기 |
「CCCP」 | 『三千里』삼천리 | 1933. 02 | 구미유기 2 |
「모델-女人日記여인일기」 | 『朝鮮日報』조선일보 | 1933. 02. 28 | 수필 |
「伯林백림과 巴里파리」 | 『三千里』삼천리 | 1933. 03 | 구미유기 3 |
「원망스런 봄밤」 | 『新東亞』신동아 | 1933. 04 | 수필 |
「의 巴里行파리행」 | 『三千里』삼천리 | 1933. 05 | 구미유기 4 |
「美展미전의 印象인상」 | 『每日申報』매일신보 | 1933. 05. 16 ~ 21 | 미술비평 |
「巴里파리의 어머니날」 | 『新家庭』신가정 | 1933. 05 | 구미여행기 |
「伯林백림에서 倫敦윤돈(런던)지」 | 『三千里』삼천리 | 1933. 09 | 구미유기 5 |
「연필로 쓴 편지」 | 『新東亞』신동아 | 1933. 10 | 수필 |
「西洋서양 藝術예술과 裸體美나체미」 | 『三千里』삼천리 | 1933. 12 | 구미유기 6 |
『김명애』 | 미간행 | 1933. 12 | 장편소설(원고일실) |
「떡 먹은 이야기」 | 『朝鮮中央日報』조선중앙일보 | 1934. 01. 14 | 콩트 |
「밤거리의 祝賀式축하식(歐구)」 | 『中央』중앙 | 1934. 02 | 구미여행기 |
「多情다정하고 實質的실질적인 佛蘭西불란서(프랑스) 婦人부인-歐米구미 婦人부인의 敎養교양잇는 家庭生活가정생활」 | 『中央』중앙 | 1934. 03 | 구미여행기 |
「영원히 이저주시오」 | 『月刊海新』월간해신 | 1934. 03 | 수필 |
「朝鮮조선에 태어난 것을 행복으로 압니다」 | 『三千里』삼천리 | 1934. 05 | 설문응답 |
「情熱정열의 西班牙行서반아행」 | 『三千里』삼천리 | 1934. 05 | 구미유기 7 |
「날러간 靑鳥청조(파랑새)-연애와 결혼문제」 | 『中央』중앙 | 1934. 05 | 수필 |
「女人여인 獨居記독거기(혼자 사는 기록)」 | 『三千里』삼천리 | 1934. 07 | 수필 |
「巴里파리에서 紐育뉴욕으로」 | 『三千里』삼천리 | 1934. 07 | 구미유기 8 |
「내가 서울 여시장이 된다면」 | 『三千里』삼천리 | 1934. 07 | 설문응답 |
「哀話애화 叢石亭海邊총석정해변」 | 『月刊每申』월간매신 | 1934. 08 | 수필 |
「離婚이혼 告白狀고백상-靑邱氏청구씨에게」 | 『三千里』삼천리 | 1934. 08 ~ 09 | 페미니스트 산문 |
「太平洋태평양 건너서(故國고국으로)」 | 『三千里』삼천리 | 1934. 09 | 구미유기 9 |
「伊太利이태리 美術館미술관」 | 『三千里』삼천리 | 1934. 11 | 구미여행기 |
「伊太利이태리 美術紀行미술기행」 | 『三千里』삼천리 | 1935. 02 | 구미여행기 |
「新生活신생활에 들면서」 | 『三千里』삼천리 | 1935. 02 | 페미니스트 산문 |
「앗겨 무엇하리, 靑春청춘을」 | 『三千里』삼천리 | 1935. 03 | 시 |
「羅女史나여사의 書翰서한」 | 『三千里』삼천리 | 1935. 03 | 미술관계편지 |
「歐米구미(유럽+미국) 女性여성을 보고 半島반도 女性여성에게」 | 『三千里』삼천리 | 1935. 06 | 여성비평 |
「異性間이성간의 友靑論우청론-아름다운 男妹남매의 記기」 | 『三千里』삼천리 | 1935. 06 | 수필 |
「나의 여교원 시대」 | 『三千里』삼천리 | 1935. 07 | 수필 |
「獨身女性독신여성의 貞操論정조론」 | 『三千里』삼천리 | 1935. 10 | 여성비평 |
「巴里파리의 그 女子여자」 | 『三千里』삼천리 | 1935. 11 | 희곡 |
「英米영미 婦人부인 參政權참정권 運動者운동자 會見記회견기」 | 『三千里』삼천리 | 1936. 01 | 여성비평 |
「倫敦윤돈(런던의 음역어) 救世軍구세군(기독교의 한 파) 託兒所탁아소(아동복지시설)를 尋訪심방하고」 | 『三千里』삼천리 | 1936. 04 | 여성비평 |
「佛蘭西불란서(프랑스) 家庭가정은 얼마나 다를가」 | 『三千里』삼천리 | 1936. 04 | 구미여행기 |
「玄淑현숙(겁고 맑은)」 | 『三千里』삼천리 | 1936. 12 | 단편소설 |
「애정에 우노라······」 | 『三千里』삼천리 | 1937. 04 | (미발굴) |
「나의 東京女子美術學校時代동경여자미술학교시대」 | 『三千里』삼천리 | 1937. 05 | 수필 |
「靈영(영혼)이냐, 肉육(육체)이냐, 靈肉영육이냐, 靈肉영육이 合합(+)한 戀愛연애라야한다」 | 『三千里』삼천리 | 1937. 12 | 여성비평 |
「海印寺해인사의 風光풍광」 | 『三千里』삼천리 | 1938. 08 | 수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