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목차
생애
1900~1910년대
년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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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5월 22일 |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부친 이시우(李時雨), 모친 김신자(金愼子)의 차남으로 출생 |
1923년 3월 | 부친 이시우 사망, 상정 12세, 상화 8세, 상백 6세, 상오 4세 |
1914년 | 한문수학을 마친 후 1년간 신학문(일어, 산술, 박물 등 초등학교 과정)을 배움 |
1915년 | 서울 계동 32번지에서 하숙하면서 정규교육기관인 경성 중앙학교 입학 |
1917년 | 경성 중앙학교 3년 수료, 7월 강원도 일대 방랑 |
1919년 | 백기만 등과 대구 3 · 1운동거사 당시 학생운동 배후조종, 선전문 등 사 · 배포 등으로 활동함. 사전에 주요 인물이 검속되어 서울 서대문구 냉동 92번지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 10월 공주 출신 서순애(徐順愛)와 혼인 |
1920년대
년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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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나도향, 홍사용, 박종화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창간호에 시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 도일하여 동경에 있는 외국어전문학교인 '아테네 프랑세' 입학 |
1923년 3월 | '아테네 프랑세' 수료, 「나의 침실로」(«백조» 3호) 발표,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에서 본 일본인의 학살에 분노, 이듬해 3월 귀국.
서울 가회동 소재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면서 시작(詩作)에 전념. 고향 친구 박태원의 죽음을 두고 쓴 시 「이중의 사망」(«백조» 3호) 발표. 김기진 등과 무산계급 문예운동단체인 "파스큘라" 결성 |
1925년 | "파스큘라"가 개최한 천도교기념관에서 문예강연 및 시낭독회에 출연하여 시 '이별을 하느니' 낭독. 8월 박영희, 김기진 등과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발기인으로 참여 |
1926년 | 1926년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70호) 발표. 카프 기관지 〈문예운동〉 주간.
「조선병」, 「겨울마음」, 「지구 흑점의 노래」, 「문예의 시대적 변위와 작가의 의식적 태도론」 등을 발표. 장남 용희(龍熙) 출생 |
1928년 |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ㄱ당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당시 상화는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 간사직에 있었다). 상화는 이 시기에 자기 집 사랑방을 '담교장(談交莊)'이라 칭하였으며, 수많은 항일 인사들이 출입 |
1930년대
년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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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 「대구행진곡」(«별건곤(別乾坤)» 10월호) 발표 |
1932년 | 담교장이라 칭하던 서문로 집을 처분하고 대구시 중구 장관동 50번지로 이전 |
1933년 8월 | 경북지사로부터 교남학교 강사 인가(경북학비 제 449호)를 받고 근무. 담당은 조선어와 영어, 이듬해 사임. 「반딧불」, 「농촌의 집」에 이어 두 번째 창작소설 「초동(初冬)」(«신가정» 10월호) 발표 |
1934년 | 차남 충희(忠熙) 출생. 친구들의 권유로 조선일보 경북총국을 경영했으나 실패, 대구시 중구 남성로 35번지로 이주 |
1935년 | 시 「역천」(«시원» 2호), 「나는 해를 먹다」(«조강» 2호) 발표, 백부 소남 이일우 사망 |
1936년 | 백씨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행. 남경, 북경, 상해 등지를 3개월 유람한 후 귀국 |
1937년 | 귀국 후 경찰에 구금되어 20여 일 심한 고초를 겪음.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교가 작사. 대구시 중구 종로2가 72번지로 이주 |
1938년 | 태희(太熙) 출생 |
1939년 6월 |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로 이사. 교남학교 교가 가사 문제로 가택 수색을 당하여 자신의 시 원고와 보관 중이던 고월 유고까지 압수당함 |
1940년대
년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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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김소운 번역의 «조선시집»(河出書房)에 「나의 침실로」 등 3편이 수록됨 |
1941년 | 시 「서러운 해조」(«문장» 25호) 발표 |
1943년 4월 25일 | 오전 8시 45분, 계산동 2가 84번지 고택에서 부인과 세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숙환으로 운명. 달성군 화원면 본리리 산 9번지 월성 이씨 가족묘지에 묻힘. 10월 백기만의 발의로 서동진·박명조 설계, 윤갑기 · 김준묵의 참여로 묘 앞에 ‘詩人白亞月城李公諱相和之墓’라는 비가 세워짐 |
작품
문학사적 의의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줌
• 이상화가 살다 간 1920년대는 이 땅의 봉건적 유교적 가치 질서에 기반을 둔 전통문화가 와해되고 근대적인 서구 문화가 유입되는 문화적, 정신사적 전환기임.
따라서 민중은 물론 지식인들에게 삶의 딜레마를 한층 가중시킨 궁핍한 시기라 할 수 있으며, 3·1운동의 실패로 이 땅의 지식인들은 절망과 비애 속에서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 상태에 놓임.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그의 작품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울하며 죽음과 관련된 내용이 많음. 하지만, 이상화가 다른 시인들과 달리 민족저항 시인으로 평가받는 것은 그가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적인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임.
• 1920년대 시단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의 자생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전통 철학의 토대 위에 그 나름의 시세계를 구축하였음
이상화 관련 문화공간
이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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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상화 |
한자 | 李相和 |
생몰년 | 1901~1943 |
출생지 | 대구 |
직업 | 시인, 작가 |
학력 | 일본 도쿄 외국어학교 불어학과 중퇴 |
활동분야 | 현대문학 |
관련단체 | 백조, 파스큘라,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
이상화(1901~1943)
개요
이상화(李相和)는 일제 강점기의 문학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이다. 작가 현진건과는 같은 대구 출신으로 태어나 친분관계를 맺다가 동일한 해와 날짜에 사망하였다. 초기 낭만주의적 성향이 강하며 친일문학이 만연했던 시대에 항일 민족 문학을 창작하였다는 점을 높게 평가받는다.
생애
날짜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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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5.22 | 경상북도 대구부 서문로에서 출생 |
1918 | 경성 중앙학교 중퇴 |
1921 |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를 만나〈백조〉동인에 참여 |
1922 |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 프랑세 어학원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 |
1925 | 파스큘라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 |
1927 | 의열단(義烈團)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 |
1933 | 교남학교(지금의 대륜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
1934 | 조선일보사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으나 1년 만에 실패, 교사로 복직. |
1937 | 3월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다녀왔다가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어 11월 말경 석방. |
1940 | 교사직 퇴임, 「춘향전」의 영어 번역과「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의 한글 번역 시도. |
1943 | 위암으로 사망. |
작품 및 저서
이상화의 작품은 시기에 따라 그 성격이 나뉘어 지는 특징이 있다. 작품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초기 작품
백조의 동인으로서 문단 데뷔를 함으로서 시작한 작품을 뜻한다. 현실을 부정하고 자아의 감정에 중심을 두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낭만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다.
- 백조(1922)
- 「말세의 희탄(欷嘆)」
- 「단조(單調)」
- 「가을의 풍경」(백조, 1922)
- 백조(1923)
- 「이중(二重)의 사망」
- 「나의 침실로」
- 개벽(1925)
- 「몽환병(夢幻病)」
- 「비음(緋音)」
- 「이별(離別)을 하느니」(조선문단, 1925)
중기 작품
주로 백조파(白潮派)의 낭만주의와 창조파(創造派)의 자연주의 경향을 비판하고 일어난 사회주의 성격의 신경향파 성향의 문학을 창작하였다. 주로 시대에 대한 한탄과 소극적인 항일의 의지를 보여주는 작품이 쓰였다.
- 개벽(1925)
- 「가상」
- 「구루마꾼」
- 「엿장사」
- 「거러지」
- 「조소(嘲笑)」
- 「선구자(先驅者)의 노래」
- 개벽 (1926)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통곡(慟哭)」
- 「조선병(朝鮮病)」
- 「비갠 아침」
- 「도-쿄에서」(문예운동, 1926)
- 「파-란비」(신여성, 1926)
- 「저므는 놀안에서」(조선문예, 1928)
후기 작품
작품 전체적으로 회의적인 관점과 좌절의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초기의 어둡고 감상적인 시와 중기의 저항적인 시에서 벗어나 민족의 비해를 자연으로 돌려 서정적인 면이 강해졌다.
- 「역천(逆天)」(시원, 1935)
- 「서러운 해조」(문장, 1941)
관련 학술서
- 조은주. (2013). 계몽의 주체와 향락의 주체가 만난 자리. 한국현대문학연구, 40(), 123-155.
- 권유성. (2010).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재고. 어문학, 110(), 249-271.
- 오세인. (2010). 식민지적 디아스포라와 유랑 의식. 어문론집, 45(), 7-36.
관련 콘텐츠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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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 1901년 | A는 B에 태어나다 |
이상화 | 1943년 | A는 B에 사망하다 |
이상화 | 대구 | A는 B에서 출생하다 |
박종화 | 1901년 | A는 B에 태어나다 |
현진건 | 1943년 | A는 B에 사망하다 |
현진건 | 대구 | A는 B에서 출생하다 |
이상화 | 백조 | A는 B에 참여하다 |
현진건 | 백조 | A는 B에 참여하다 |
박종화 | 백조 | A는 B에 참여하다 |
백조 | 낭만주의 | A는 B이다 |
이상화 | 프랑스 | A는 B에 유학가다 |
이상화 | 파스큘라 | A는 B에 참여하다 |
파스큘라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 A는 B에 소속하다 |
이상화 | 교남학교 | A는 B에 근무하다 |
이상화 | 조선일보사 | A는 B를 경영하다 |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A는 B를 창작하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뮤지컬 | A는 B로 만들어지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연극 | A는 B로 만들어지다 |
참고문헌
- 홍정희. (2009). 격정과 방황으로 살다 간 저항시인, 이상화. 문예운동, (), 6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