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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18년(17세)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중등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당시 문우로는 3년 선배인 [[홍사용]], 2년 선배인 [[박종화]], 1년 선배인 [[김영랑]], 동급생인 [[이선근]]과 [[박제찬]], 1년 후배인 [[이태준]] 등이 있다. 이들은 뒷날까지도 정지용과 가까이 지낸 문우들이다.
 
이후 1918년(17세)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중등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당시 문우로는 3년 선배인 [[홍사용]], 2년 선배인 [[박종화]], 1년 선배인 [[김영랑]], 동급생인 [[이선근]]과 [[박제찬]], 1년 후배인 [[이태준]] 등이 있다. 이들은 뒷날까지도 정지용과 가까이 지낸 문우들이다.
  
정지용은 휘문고보 1학년 때 [[요람동인(搖籃同人)]]을 결성하여 동인지를 간행하고 문우회 학예부장을 맡았으며, 2학년 때는 <서광> 창간호에 그의 유일한 소설이 되는 「[[3인]]」을 발표하는 등 날로 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1학년 때 88명 중 수석일 정도로 학교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할 위기가 닥쳐왔으나, 담임선생님의 추천에 의해 교비생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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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은 휘문고보 1학년 때 [[요람동인]](搖籃同人)을 결성하여 동인지를 간행하고 문우회 학예부장을 맡았으며, 2학년 때는 <서광> 창간호에 그의 유일한 소설이 되는 「[[3인]]」을 발표하는 등 날로 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1학년 때 88명 중 수석일 정도로 학교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할 위기가 닥쳐왔으나, 담임선생님의 추천에 의해 교비생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문단 데뷔와 입신양명===
 
===문단 데뷔와 입신양명===

2019년 6월 13일 (목) 19:21 판


정지용(1902.05.15~1950.09 추정)

생애

한약상의 장남으로 출생

정지용은 1902년 6월 20일(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 하계리에서 약상(藥商)을 경영하던 정태국(鄭泰國)과 정미하(鄭美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연못의 용이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 하여 아명을 지룡(池龍)이라 하였고, 이름도 지용(芝溶)이라고 짓게 되었다. 가톨릭신자이기 때문에 프란시스코(方濟角)라는 세례명도 갖고 있었다.

위기의 문학적 요람기

1910년(9세)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913년(12세) 동갑내기인 송재숙과 결혼하였다. 당시 부친이 약상을 경영했기 때문에 집안에 부가 축적되어 있었으나 느닷없는 홍수로 인해 가세가 기울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서울유학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향학열을 억누르지 못한 정지용은 서울로 상경하여 처가의 친척집에서 약 3년 동안 집안의 잔심부름을 하며 틈틈이 시객들에게 한문을 배우며 소년기를 보냈다.

이후 1918년(17세)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중등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당시 문우로는 3년 선배인 홍사용, 2년 선배인 박종화, 1년 선배인 김영랑, 동급생인 이선근박제찬, 1년 후배인 이태준 등이 있다. 이들은 뒷날까지도 정지용과 가까이 지낸 문우들이다.

정지용은 휘문고보 1학년 때 요람동인(搖籃同人)을 결성하여 동인지를 간행하고 문우회 학예부장을 맡았으며, 2학년 때는 <서광> 창간호에 그의 유일한 소설이 되는 「3인」을 발표하는 등 날로 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1학년 때 88명 중 수석일 정도로 학교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할 위기가 닥쳐왔으나, 담임선생님의 추천에 의해 교비생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문단 데뷔와 입신양명

휘분고보를 졸업하고 한 달 후, 정지용은 1923년 4월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그는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물과 세계를 접하는 한편, 자신의 빈곤한 처지와 휘문학교 교주 민영휘의 도움을 받는 교비장학생이라는 신분 그리고 식민지배하에 있는 조선 유학생이라는 내·외적 압박에 시달렸으리라 추정된다.

그의 첫 작품 「카페프린스」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청년들의 자의식을 모던한 감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이 된다. 1926년 유학생회지 <학조>의 창간호에 정지용은 「카페프린스」 외에도 「슬픈 인상화」, 「파충류 동물」을 비롯해 시조와 동요를 발표하고 다양한 문학의 가능성을 실험하였다.

이후에도 근대 풍물과 이국정서를 신선한 감각으로 화폭에 담은 듯 한 시들을 발표한다. 곧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 정지용은 이듬해 <신민>과 <문예시대>그리고 <조선지광>에 여러 작품을 쏟아낸다. 당시 일본시단을 대표하던 기타하라 하큐슈(北原白秋)가 주관하던 잡지 <근대풍경>에 투고한 시가 호평과 함께 지면을 장식함으로써 일본의 문단에도 그의 이름이 알려진다. 윌리암 블레이크에 관한 논문을 내고 대학을 졸업했지만 정작 그가 심취한 것은 인도의 타고르와 자신을 뽑아 준 기타하라 하큐슈의 시, 중국의 한시와 같이 동양사상에 바탕을 둔 시였다.

암흑기

정지용은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그의 모교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기초영어만 가르치는 것이 썩 달갑지 않았는지 종종 학생들에게 신경질을 부려 ‘신경통’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그 와중에도 정지용은 계속 시인활동을 이어가 1941년 9월 시집 「백록담」을 간행하였고, 12월 태평양 전쟁 이후 항복할 때까지 당시 문인들은 친일을 강요당하거나 침묵을 지켜야 하는 암흑기를 살아가야만 했는데 정지용도 예외는 아니었다.

8·15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 이후 정지용은 <경향신문>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하게 되며,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 강의도 하게 된다. 1946년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시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특기할만한 것은 줄곧 순수 지향적 예술세계를 고집하던 시인 정지용이 느닷없이 민족문학건설을 표방하는 좌익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투철한 민족정신을 가진 그가 해방 직전 일종의 의전행위로 미온적으로나마 일제에 협력한 것에 대한 반성과 이태준, 이병기 등 과의 친분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공산주의는 싫지만 몇 십 년을 두고 사귄 우의는 끊을 수 없다.”고 했던 그의 말에서도 이러한 점은 드러난다.

정부수립 이후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정지용은 정확한 까닭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과 경향신문 주간직을 사임하고,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문학독본」을 출간했다. 이듬해 6월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 뒤에는 좌익작가로 분류되어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했던 다른 문인들과 함께 강제로 가입되면서 강연에 동원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납북 그리고 사망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정지용은 김기림, 박영희 등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 수용되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에는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면서 그의 행적이 묘연해졌다. 사망 시기도 확실치 않아 1953년 북한 평양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93년 4월 북한의 <통일신보>에서 가족과 지인들의 증언을 인용하여 정지용의 사망 시기를 발표하게 된다. 발표 내용에는 정지용이 1950년 9월경 납북되는 과정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경기도 동두천 인근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납북과 사망 이후 비극

1950년 납북되고 사망하기까지 한 이후, 정지용의 행적에 대한 갖가지 추측과 오해로 인해 그의 유작의 간행이나 논의 등이 무려 30년 넘게 금기되며 한국 문단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다 1988년 납·월북 작가에 대한 정부의 해금 조치로 정지용 작품집의 출판과 문학사적 논의가 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사망 이후 1988년까지는 정지용이라는 한 인간의 비극이자 문학의 비극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 정지용의 삶은 20세기 전반기의 식민지를 살아야 했고, 민족 분단을 경험해야 했으며, 결국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야 했다. 그러나 시인 정지용의 작품과 그 업적은 한국 문학사에 길이길이 남게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학력 사항

  • 옥천공립보통학교
  • 휘문보통고등학교
  • 도시샤대학교 영문학

경력 사항

연보

연도 내용
정지용 생애 연보
1902년 (1세) 6월 20일(음력 5월 15일) 한약상을 운영하던 정태국과 정미하의 장남으로 충북 옥천에서 출생.
1910년 (9세)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 입학.
1913년 (12세) 동갑내기 송재숙과 결혼.
1915년 (14세)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처가의 친척집에서 약 3년 동안 집안의 잔심부름을 하며 한문을 배움.
1930년 (22세) 동경법정대학 예과 입학 및 중퇴. 영화, 미술, 음악 등 서양 예술과 신심리주의의 문학에 경도됨. 단편 소설「수염」을 발표하여 소설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수필 평론 등을 꾸준히 발표.
1933년 (25세)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친목단체인‘구인회’에 가담하여 활동. 「낙조」, 「옆집색시」, 「피로」, 「오월의 훈풍」등 많은 작품을 발표.
1934년 (26세) 10월 27일 보통학교 교원인 김정애와 결혼.
1936년 (28세) 1월 16일 오후 4시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맏딸 출생 (이날은 눈이 제법 오고 매서웁게 춥던 날인데 아버지가 되는 시간에 다방 낙랑에서 시인 이상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고 「결혼 5년의 감상」에서 술회.)
1937년 (29세) 7월 30일 서울 관동(지금의 교북동) 12번지 4호에서 둘째딸 소영(영화감독 '봉준호'의 어머니) 출생.
1938년 (30세) 장편 소설집 『천변풍경』과 단편 소설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출간.
1939년 (31세) 9월 27일(음력 8월 15일)에 서울 예지동 121번지에서 맏아들 일영 출생.
1940년 (32세) 서울 돈암동에 집터를 마련. 새로 집을 짓고 솔거하여 이사. 문장에 장편소설 『애경』연재.
1941년 (33세)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여인성장』을 연재하는 한편, 번역소설 『신역 삼국지』를 <신시대>에 연재. 「투도」를 <조광>에,「채가」를 <문장>에 발표.
1942년(34세) 1월 15일 서울 돈암동 487번지 22호에서 둘째아들 재영 출생. <조광>에서 중국 소설 「수호전」을 3년에 걸쳐 연재. 장편소설집 『여인성장』을 출간.
1945년 (37세) 조선문학건설본부 소설부 중앙위원회 조직임원으로 선정. <매일신보>에 장편 『원적』을 연재하다 76회로 중단.
1946년 (38세) <조선주보>에 장편 『약탈자』 연재.
1947년 (39세) 장편소설 『홍길동전』출간. 7월 24일 셋째 딸 은영 출생.
1948년 (40세) 국민보도연맹에 가담하여 전향 성명서 발표. 성북동 39번지로 가족과 함께 이사.
1949년 (41세) <조선일보>에 (갑오농민전쟁의 모태가 되는) 「??」을 6월 15일~ 50년 5월 2일까지 발표. 종군 기자로 활동(1부만 완성됨).
1950년 (42세) 6.25 동란 중 월북.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재직
1956년 (48세) 남로당 계열로 몰려 작품활동이 금지됨
1960년 (52세) 작가로 복귀
1975년 (67세) 전신불수
1977년 (69세) 망막염으로 인한 실명과 전신불수의 몸으로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대하소설을 구술로 받아쓰게 하여 1부 완성.
1986년 (78세) 북한 <조선문학> 7월호에서 박태원이 고혈압에 시달리다 7월 10일 오후 사망했다고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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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수상내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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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어(S) 목적어(O) A는 B를 ~하다(P)

참고문헌

  • 나는 문학이다, 장석주, 2009, 나무이야기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