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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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명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5일 (수) 20:13 판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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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출생-사망

1904년 출생~사망 미상

출생지

대한민국 강원도 철원

데뷔

1925년 조선문단에「오몽녀」로 작품활동 시작

작품목록

  • 달밤
  • 가마귀
  • 복덕방
  • 패강랭
  • 돌다리
  • 해방전후
  • 물고기 이야기
  • 오몽녀
  • 사상의 월야
  • 구원의 여상
  • 딸 삼형제
  • 사상
  • 무서록
  • 문장강화
  • 상허 문학독본
  • 행복
  • 모던 걸의 만찬
  • 그림자
  • 온실 화초
  • 누이
  • 기생 산월이
  • 백과전서의 신의의
  • 은희 부처
  • 어떤 날 새벽
  • 결혼의 악마성
  • 고향
  • 아무 일도 없소
  • 불우 선생
  • 천사의 분노
  • 실낙원 이야기
  • 서글픈 이야기
  • 코스모스 이야기
  • 슬픈 승리자
  • 꽃나무는 심어 놓고
  • 미어기
  • 아담의 후예
  • 어떤 젊은 어미
  • 어떤 화제
  • 마부와 교수
  • 방물장사 늙은이
  • 빙점하의 우울
  • 촌뜨기
  • 점경
  • 우암 노인
  • 애욕의 금렵구
  • 색시
  • 손거부
  • 순정
  • 삼월
  • 바다
  • 장마
  • 철로
  • 코스모스 피는 정원
  • 사막의 화원
  • 영월 영감
  • 아련
  • 농군
  • 밤길
  • 토끼 이야기
  • 사냥
  • 석양
  • 무연
  • 뒷방마님
  • 농토
  • 어린 수문장
  • 불쌍한 소년 미술가
  • 슬픈 명일 추석
  • 쓸쓸한 밤길
  • 불쌍한 삼형제
  • 외로운 아이
  • 몰라쟁이 엄마
  • 엄마 마중
  • 제 2의 운명
  • 성모
  • 소련기행
  • 먼지
  • 구장의 처
  • 법은 그렇지만
  • 코가 복숭아처럼 붉은 여자
  • 황진이
  • 화관
  • 딸 삼형제
  • 청춘무성별은 창마다
  • 행복에의 흰손들
  • 왕자호동
  • 석교
  • 제1호선박의 삽화
  • 즐거운 기억
  • 불사조
  • 첫 전투
  • 아버지의 모시옷
  • 호랑이 할머니
  • 삼팔선 어느 지구에서
  • 백배천배로
  • 누가 굴복하는가 보자
  • 미국 대사관
  • 고귀한 사람들
  • 네거리에 선 전신주
  • 고향길
  • 두 죽음

생애

연보

연도 내용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진명리 출생. 부친 이창하(李昌夏), 모친 순흥 안씨의 1남 2녀 중 장남. 집안은 장기 이씨(長? 李氏) 용담파(龍潭派). (?장기이씨 가승(家乘)?에 의하면 상허의 본명은 규태(奎泰). 부친의 정실 은 한양 조씨이고 적자로 규덕(奎悳)이 있음). 호는 상허(尙虛) · 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 父 이창하(1876~1909) 의 字는 문규(文奎), 호는 매헌(梅軒). 철원공립보통학교 교원, 덕원감리서 주사를 역임한 개화파적 지식인.

학력

  • 철원 봉명학교
  • 1921년 ~ 휘문고등보통학교(중퇴)
  • 1927년 ~ 일본 도쿄 조치대학교 - 예과(중퇴)

작품의 특징

광복 이전의 작품은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띠기보다는 구인회의 성격에 맞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나타냈으며, 특유의 섬세한 묘사와 동정적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로 단편소설의 서정성을 높여 예술적 완성도와 깊이를 세워 나갔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 성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작품을 만들었는데, 광복 이전과는 다르게 사상적인 요소도 작품안에 포함을 시키기 시작했다. 일전에는 순수하게 작품을 만들었다면, 이후에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담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광복 이전에 쓴 작품들이 현실에 초연한 유형의 작품들이 친일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판결을 받아 광복 이후의 삶 역시 우울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이전과 그 후

수연산방의 주인이었던 상허 이태준 작가는 당시 최고의 문학인으로 평가받으며, 일제시대 말기까지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수연산방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태준 작가와 그의 가족들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볼 수 있는데. 하지만 걸린 사진과는 다르게 이태준 작가의 가족사는 매우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전에는 그는 그만의 특유의 작품 색깔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고 단번에 그 시대의 스타로 떠올랐었다. 그는 최고의 문장가로 칭송을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고 그는 순수 문학인의 지조를 지키며 살아가고 싶었지만 일제의 탄압에 의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의 소설을 쓰게 된다. 그렇게 고난을 겪고 이후 1946년경 그는 가족들과 함께 월북을 하게 된다. 월북을 하고 초반에는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았지만 그 이후에는 사람들이 그를 이용하려고만 하였고 이후 일제강점기때 쓴 친일작품이 문제가 되면서 이태준 작가는 숙청을 당했고, 그의 가족들 역시 연좌제로 숙청을 당하거나 추방을 당했다. 그는 작가로 데뷔하고 초창기에는 빛을 보는 듯 했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천재라 할 수 있을 것 이다

관련 콘텐츠

  • <지식채널 E> 처음 글을 쓰는 사람들을 위하야_#001

경력사항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태준 조선문단 A는 B에 데뷔했다.
이태준 수연산방 A는 B에 살았다.
이태준 상허학회 A를 B가 연구했다.
이태준 구인회 A는 B에서 활동했다.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김경주

기여자:김우진, 한승원, 임지영


2019 인문정보콘텐츠

기여자 : 이지희, 나도명, 김진형, 김효진, 박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