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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5일 (토) 22:51 판


홍명희(1888~1968)

생애와 연보

  • 생애


  • 연보

1888년 (1세) 음력 5월 23일, 충북 괴산에서 홍범식과 은진송씨간의 장남으로 태어남.본관은 풍산, 호는 가인, 벽초.

1900년 (13세) 여흥 민씨가의 규수 민순영과 조혼하다.

1902년 (15세) 서울중교의숙에 입학하다.

1903년 (16세) 장남 홍기문 태어나다.

1906년 (19세)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도요상업학교예과에 편입하다.

1907년 (20세) 도쿄 다이세이 중학교에 편입하다.

1910년 (23세) 다이세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소년』지에 번역시「사랑」등을 발표하여 신문학 운동에 동참하다. 8월 29일, 군산군수로 재직중이던 부친 홍범식이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순국하다.

1912년 (25세) 해외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중국으로 떠나다.

1913년 (26세) 상하이에서 독립운동단체 동제사에 가담, 활동하다.

1914년 (27세) 독립운동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남양으로 행하다.

1919년 (32세) 3.1운동 당시 괴산만세시위를 주도하여 투옥되다.

1920년 (33세) 출옥하다.

1923년 (36세) 서울에서 조선도서주식회사 전무로 근무하고 사회주의 사상단체 신사상 연구회에 창립회원으로 가담하다.

1924년 (37세)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취임하고 화요회에 가담하다.

1926년 (39세) 시대일보 사장이 되고 칼럼집 『학창산화』를 간행하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연구단체 조선사정조사연구회 결성에 참여하다. 평북정주의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다.

1927년 (40세) 민족 협동전선 신간회가 결성 될 때 주도적 역할을 하고 결성 후 신간회 조직부 총무간사로 활동하다. 오산학교 교장직 사임하다.

1928년 (41세) 11월 21일『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하다.

1929년 (42세) 12월 신간회 민중대회사건으로 투옥되고『임꺽정』연재를 중단하다.

1932년 (45세) 가출옥으로 출감하다. 12월『조선일보』에『임꺽정』연재를 재개하다.(「의형제편」부터)

1935년 (48세) 12월 병으로 인해『임꺽정』연재를 중단하다.

1937년 (50세) 12월 조선일보에『임꺽정』연재를 재개하다.(「화적편」 ‘송악산’ 장부터)

1939년 (52세) 7월 임꺽정 연재를 중단하다.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임꺽정』4권이 간행되다. (~1940년) 경기도 양주 창동으로 이주하여 은둔생활을 하다.

1940년 (53세) 10월『조광』지에『임꺽정』연재를 재개하다. 그러나 단 1회 게재 후 임꺽정 연재는 영구히 중단되다.

1948년 (61세) 을유문화사에서『임꺽정』6권이 간행되다. 4월 김구, 김규식등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 회의에 참가하다. 그 후 북에 남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부수상으로 임명되다.

1954년 (67세) 평양국립출판사에서『림꺽정』6권이 간행되다.(~1955)

1961년 (73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대위원장이 되다.

1962년 (74세) 부수상직을 사임하고 조선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다.

1968년 (80세) 3.5일 노환으로 별세하다.

작품활동

홍명희는 일제강점기 최대의 장편소설의 하나로 손꼽히는 『임꺽정(林巨正)』을 발표함으로써 문학사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은 1928년 『조선일보』에 첫 연재를 시작한 뒤 세 차례에 걸쳐 중단되었다가, 광복 직후 미완의 상태로 전 10권이 간행되었다. 조선 중기에 지방의 도둑으로 실록에 그 행적이 단편적으로 기술되기도 한 임꺽정의 이야기를 방대하게 그려내었다. 이 작품의 특징으로는 첫째, 민중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탁월한 안목을 보여 준다. 당시 종래의 역사소설이 철저히 왕조사 중심이거나 근거 없는 야사에 의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역사 왜곡과 함께 잘못된 역사 인식을 심어 주었던 것에서 벗어나 이 소설은 충실하게 민중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둘째, 그로인해 당시의 상·하층에 두루 걸친 생활상과 지배계급의 관습을 충실히 재현해 내고 있다. 셋째, 우리말의 고유어와 사투리를 자주 사용하였다. 소설 속에 부려쓰고 있는 낱말과 문체에서 우리 고유어를 풍부히 되살려 내고 있으며, 일본어 번역투에 오염되지 않은 우리 입말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켜 내고 있어, 연재 당시에도 ‘조선말의 무진장한 노다지’라고 평가받기도 하였던 소설 문체의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넷째, 민중정서의 형상화를 그려내었다. 봉건적 요소에 저항하는 반봉건적 움직임의 강한 생명력을 드러냄으로써 건강하고 낙천적인 민중정서의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 소설은 당시 역사소설의 양대 흐름을 지배하던 이광수(李光洙)류의 교훈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이나, 박종화(朴鍾和)·김동인(金東仁) 류의 야사에 기댄 영웅주의적이고 부정확한 역사소설의 경향을 뛰어넘어 민중 정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역사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홍명희의 수필집으로 B6판, 반양장 182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1926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하였다. 서문이나 후기 없이 바로 본문에 들어가 <과학> <질소량><양><활동사진><색각과 감정><인도사회><미신> 등 92편이 수록되어 있다. 수필이라기보다 해설과 단상이 주가 되어 있는 지식을 위한 교양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서두의 <과학>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과학은 무엇인가. 실험, 관찰, 비교, 추리로 얻은 각각의 지식을 통일하여 일과학문을 조직한 것이다. 그 목적하는 바는 곧 개개 지식을 추구하여 일정한 이법에 도달함이다. 과학을 광의로 말하면 자연계 특수 현상을 연구하는 자연과학과 사상 행위 미감의 법칙을 연구하는 정신과학을 포함하나, 협의로 말하면 자연과학을 지칭함에 그치는 것이다. 희랍 대학자 아리스토톨은 싸이엔스(Science)를 3종으로 대별했다. 一(일)은 순리적(純理的 Theoretical)이니 수학 물리학 철학 같은 것을 이름이요, 二(이)는 실천적(Practical)이니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 같은 것이요, 三(삼)은 창조적(Creative)이니 시학, 미사학(美辭學) 같은 것을 이름이다.”와 같이 거의 해설로 되어 있다.

유학생활

1905년, 18세였던 홍명희는 중교의숙을 졸업하고 다시 고향인 충북 괴산으로 내려왔다. 우연히 그곳에 잠깐 머물던 일본인 부부에게 일본어를 배운 뒤로 그는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1905년 여름 무렵 동경으로 간 그는 이듬해 봄 동경상업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였지만, 1907년에 다시 대성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동경상업학교와 대성중학교에서의 첫 학기 성적은 우수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독서 탐독에 빠져 학과 공부를 등한시하였다. 당시 일본은 1900년대 후반기부터 일본문학사상 근대문학의 확립기이자 자연주의의 전성기를 지나고 있었다. 게다가 러일 전쟁이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일본의 근대문학 형성에 러시아 문학이 큰 영향을 끼쳤다. 홍명희 역시 그곳에 지내며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같은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가장 많이 탐독했다. 이때 가인(假人)이란 필명으로 폴란드 시인 네모에프스키의 작품 「사랑」을 비롯하여 여러 소설작품을 번역했다.

그의 유학 시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동경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후대에 우리나라 문학사, 사상사에 이름을 알린 인물들과 넓은 교우 관계를 맺었다. 동경에 도착한 직후에 홍명희가 머물던 하숙집에서 호암 문일평을 만나게 되고, 그 뒤로 춘원 이광수를 알게 된다. 그리고 후에 육당 최남선과 연을 맺은 홍명희가 이광수에게 그를 소개해주었다. 여기서 ‘동경삼재’, ‘조선삼재’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1910년 봄, 홍명희는 돌연 유학 생활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유학 시절 주로 탐독했던 일본 자연주의 작가들의 문명비평적인 작품들이 그의 가치관 형성에 큰 혼란을 주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당시 조선의 암울한 정세와 민족의 비극적 상황들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한일합병 직전에 이르기까지 점점 악화되는 정치 상황은 일본 유학생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결국 홍명희는 학문을 공부하여 조선의 신문학을 건설하는 것보다 나라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독립운동에 있어서 그의 행보에는 독립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아버지 홍범식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활동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에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나 조선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홍범식 유언

그는 항일의식을 자결로 실천한 아버지가 남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유언을 그대로 받들어 실천하였다. 홍명희는 1913년 정인보 등과 함께 상해로 건너가 해외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에서 활동했고, 홍명희는 제 1 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인 1914 년 11 월 상하이를 떠나 남양으로 향하여 김덕진 정원택 김진용과 함께 일화 배척운동에 참가. 1919년 3월 괴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반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충청북도 최초의 3.1운동 참여). 항일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루면서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 근무,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을 보고 왔으며 1927년 신간회 창설에 참가하여 부회장직을 맡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신간회 활동

홍명희는 민족해방운동이 분열되고 연정희가 부활을 기도하는 상황에 민족협동전선이 필요하 다는 인식에 따라 1927 년 1 월 29 일 권동진 · 김준연 · 문일평 · 신석우 · 신채호 · 안재홍 ·이관용 · 이승복 · 한기악 · 한용운 · 한위건 · 홍성희 등 28 인의 명의로 신간회 발기를 정식 공표하였다. “신간회 운동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민족협동전선 운동의 첫 시발로서 의의가 크다

벽초가 일제 하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그는 1927년부터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힘을 합친 민족유일당운동인 신간회를 이끌었다. 벽초와 함께 ‘조선 3재’라 불렸던 최남선 이광수가 일찍이 일제에 투항하여 조선청년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는 동안 그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고 민족개량주의자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길을 걸었다.

홍명희는 1926 년 10 월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신간회 운동에 전념하였는데, 그의 가족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시련을 겪고 있던 홍명희는 안재홍의 권유로 1928 년 11 월부터 『조선일보』에 역사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생활을 떠난 문예는 생활의 문예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임꺽정』에 강하게 반영하였다.

정치활동

기타(수상내역 등)

관련문헌

홍명희 소설가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평전으로 강영주가 집필하였다. 홍명희가 가담했던 사회운동과 정치활동에 대한 복잡한 논의는 과감하게 축소하고 개인 사와 인간적 면모에 밀착하여 홍명희 소설가의 삶을 재구성한 책이다.

RDF구축 내역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홍명희 가인 A는 B라는 필명을 가진다
홍명희 동경삼재 A는 B라 불린다
홍명희 홍범식 A는 B와 부자지간이다
홍명희 동제사 A가 B에 참여했다
홍명희 3.1운동 A가 B에 참여했다
홍명희 신간회 A가 B에 참여했다
홍명희 일화배척운동 A가 B에 참여했다
홍명희 독립선언서 A가 B를 작성했다
홍명희 만세시위 A가 B를 주도했다
홍명희 괴산홍범식고가 A는 B에서 거주했다
홍명희 홍명희문학비 A를 B가 기념한다
홍명희 부수상 A는 B다
홍명희 김일성 A는 B의 장인이다
홍명희 조국평화통일위원회 A는 B를 조직했다
홍명희 근로인민당 A는 B에 속해있다
홍명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A는 B에 속해있다
홍명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A는 B에 속해있다
홍명희 중앙상무위원회 위원 A는 B다
홍명희 중앙위원회 위원 A는 B다
홍명희 올림픽 위원장 A는 B다
홍명희 임꺽정 A는 B를 집필하다
홍명희 학창산화 A는 B를 집필하다
홍명희 홍명희평전 A는 B에 언급되다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임꺽정로 2015년 A는 B에 조성되었다
임꺽정로 부천 A는 B에 위치해있다
괴산홍범식고가 홍명희 B는 A에 거주하였다
괴산홍범식고가 홍범식 B는 A에 거주하였다
괴산홍범식고가 1730년 A는 B에 건축되었다
홍명희문학비 홍명희 A는 B를 기념하고 있다
홍명희문학비 1998년 A는 B에 건립되었다
홍명희문학비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 A는 B에 의해 건축되었다

참고문헌

  • 강영주.(1986).「홍명희와 역사소설 ‘임꺽정’」문학과지성사
  • 한승옥.(1989).「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연구」, 민음사
  • 이남호.(1990).「벽초의 '임꺽정' 연구」 동서문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임꺽정」
  • 강영주.(2004).『홍명희 평전. 사계절출판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학창산화」

작성자 및 기여자

권순영, 김민우, 김연정, 노홍우, 최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