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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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현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15일 (수) 10:4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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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29년 6월 일제 강점기 조선의 경성부, 삼천리사에서 김동환(金東煥)이 발행한 취미와 시사 중심의 월간지, 대중지 성격으로 발행한 잡지. 교양 잡지로 당시 개벽사에서 발행하던 《별건곤(別乾坤)》과 더불어 유명한 대중잡지이다. 정치, 사회, 취미, 역사, 시사 등 각 분야에 대한 다양한 글을 수록, 소개하며 시중의 은어와 비속어, 여성 운동,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폭넓게 다루는 등 호의적이었다. 《삼천리(三千里)》는 김동환, 김동인, 이광수, 염상섭, 정지용, 나혜석, 김일엽, 장면 등이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창간

《삼천리(三千里)》는 1929년 6월 12일 발간된 종합 문학잡지로 김동환(金東煥)이 편집과 발행인을 맡으며 인쇄인은 심우택(沈禹澤), 인쇄소는 대동인쇄(주), 발행사는 삼천리사이다. 창간호는 B5판 70쪽이었지만 보통은 A5판, 50쪽으로 제작되었다. 월간·격주간 등으로 B4판·A5판으로 계속 간행되었고 취미를 중심으로 한 잡지였지만 주로 가십이 작성되어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 만한 특종(特種)을 포착하여 지면에 바로 반영시켰다.

1. 훨씬 값이 싼 잡지를 만들자
2. 누구든지 볼 수 있고 또 버릴 기사가 없는 잡지를 만들자
3. 민중에게 이익이 되는 좋은 잡지를 만들자
「사고(社告)」, 『삼천리』 창간호. 1929. 6

창간호는 버드나무 아래 태극무늬 부채를 들고 있는 조선의 전통적 여인을 채색화한 표지였다. 이 표지는 『삼천리』가 문화와 대중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잡지임을 상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집필자들

김동환, 김동인, 이광수, 염상섭, 정지용, 나혜석, 김일엽, 심훈, 장면, 한용운 등의 필진은 이름난 필진이었고 당시의 국내 및 국외파 지식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이광수, 김동인 등은 고정 필자였으며 편집도 일부 맡아 진행했었다. 창간호에는 한용운, 이광수, 이은상, 박팔양, 심훈의 시, 염상섭의 소설, 그리고 안재홍, 홍명희, 신흥우, 문일평 등의 논문도 실렸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주제를 다루는 잡지였기 때문에 이광수, 나혜석 등 자신의 신념이 드러나는 작품을 만드는 이들과 정지용, 장면 등의 종교계 인사들 등의 필진이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폭넓게 참여했다.

출간 내용

성 담론과 대중 은어와 같은 것에 대해 소개, 언급하며 파격적인 구성을 보여주면서도 저속하지 않아 지식인들과 다양한 청년층에게도 호감을 얻었다. 《삼천리(三千里)》는 《별건곤(別乾坤)》과 달리 당시 정치, 시사, 사회 문화, 가정 등에 대해 폭넓게 다루었다. 문일평, 안재홍, 장도빈, 정인보 등의 역사 관련 칼럼과 논문도 실었다. 또한 자유주의, 서구 사상에 대한 소개와 여성운동과 페미니즘 문학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나혜석, 김일엽, 허정숙 등의 필자들도 종종 글을 투고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의 자유연애에 관한 것은 사생활 위주로 보도하였다.

독자

《삼천리(三千里)》가 종합지로서 오랜 시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주제와 좋은 필진 이외에 독자들의 관심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를 일으키는 읽을거리를 쉬지 않고 기획하고, 적절한 배치가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출간 초기에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식층과 청년층이 많이 접하였지만 1930년대 이후에는 지방의 중소도시의 지식인과 청년들에게도 보급되었다. 야사(野史), 시사, 역사, 여성 운동, 취미, 연애 등을 소재의 기사들도 다양하게 실어 출간하였다. 심지어 별책부록과 같은 대중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결과 1937년 전후 《삼천리(三千里)》는 ‘1만에서 3만 독자의 고정 독자들이 생겨 출간된 월간지는 한때 전국적으로 1만~2만 부 이상의 판매율을 올려 《별건곤(別乾坤)》과 경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