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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성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집안이 너무 가난해 어려서부터 각지에서 품팔이, 나무장사, 부두노동자 등 최하층 생활을 체험했다. 이러한 체험이 그의 작품의 바탕이 되는 건 훗날의 이야기이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집안이 너무 가난해 어려서부터 각지에서 품팔이, 나무장사, 부두노동자 등 최하층 생활을 체험했다. 이러한 체험이 그의 작품의 바탕이 되는 건 훗날의 이야기이다.  
 
   
 
   
1910년 아버지가 간도 지방으로 떠나 어머니와 단 둘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년시절 한문을 배우고 성진보통학교에 3년정도 재학한 것 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소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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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아버지가 간도 지방으로 떠나 어머니와 단 둘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년시절 한문을 배우고 성진보통학교에 3년정도 재학한 것 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소년시절 [[이광수]]의 <[[청춘]]>, <[[학지광]]>을 읽으며 문학에 눈을 떴고, 작가의 꿈을 키웠다. 1918년 간도로 건너가 방랑과 노동을 하며 문학 공부를 계속하였고, 1923년 간도를 나와 회령에서 잡역부 일을 하기도 했다. 1년 뒤인, 1924년 작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노모와 처자를 남겨둔 채 상경하여 이광수를 찾아갔다. 그의 주선으로 양주 봉선사에서 승려생활을 했지만, 두어 달 뒤에 다시 상경하여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였다.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작품 ‘[[토혈]]’을 발표하고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고국]]’을 발표하며 데뷔,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이와 별개로 그의 첫 작품은 [[이광수]]의 추천으로 발간한 ‘우후정원의 월광’ 등의 세 편의 시이다. 1925년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였고, 여기에 극도로 가난했던 간도 체험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 ‘[[탈출기]]’를 발표함으로써 당시 문단에 충격을 주었고, 동시에 작가로써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에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과 같은 작품들을 발표했고[[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 동맹]], [[카프]]에도 가입했다. 그는 '[[홍염]]'. '[[기아와 살육]]' 등 [[카프]]의 색체에 맞는 소설을 냈으나, 이 작품들은 대부분의 [[카프파]] 소설처럼[[이데올로기]]가 아닌 개인적인 복수나 살인 등으로 끝나는 형태를 보였다. 이후 단편 갈등을 내고 다른 [[카프]] 단원들이‘인도주의적 회색 분자' 라며 비난하자 최서해는 [[카프]]를 탈퇴하고[[매일신보]]로 이직한다. [[매일신보]]로 이직한 그는 1931년 학예부장 자리까지 승진하기도 했지만, 위 질환으로 사망하고 만다.
 
 
[[이광수]]의 <[[청춘]]>, <[[학지광]]>을 읽으며 문학에 눈을 떴고, 작가의 꿈을 키웠다. 1918년 간도로 건너가 방랑과 노동을 하며 문학 공부를 계속하였고, 1923년 간도를 나와 회령에
 
 
 
잡역부 일을 하기도 했다. 1년 뒤인, 1924년 작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노모와 처자를 남겨둔 채 상경하여 이광수를 찾아갔다. 그의 주선으로 양주 봉선사에서 승려생활을 했지만,  
 
 
 
두어 달 뒤에 다시 상경하여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였다.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작품 ‘[[토혈]]’을 발표하고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고국]]’을 발표하며 데뷔, 작품활동
 
 
 
시작한다.  
 
 
 
이와 별개로 그의 첫 작품은 [[이광수]]의 추천으로 발간한 ‘우후정원의 월광’ 등의 세 편의 시이다. 1925년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였고, 여기에 극도로 가난했던 간도 체험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 ‘[[탈출기]]’를 발표함으로써 당시 문단에 충격을 주었고, 동시에 작가로써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에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과 같은 작품들을 발표했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 동맹]], [[카프]]에도 가입했다. 그는 '[[홍염]]'. '[[기아와 살육]]' 등 [[카프]]의 색체에 맞는 소설을 냈으나, 이 작품들은 대부분의 [[카프파]] 소설처럼
 
 
 
[[이데올로기]]가 아닌 개인적인 복수나 살인 등으로 끝나는 형태를 보였다. 이후 단편 갈등을 내고 다른 [[카프]] 단원들이‘인도주의적 회색 분자' 라며 비난하자 최서해는 [[카프]]를 탈퇴하고
 
 
 
[[매일신보]]로 이직한다. [[매일신보]]로 이직한 그는 1931년 학예부장 자리까지 승진하기도 했지만, 위 질환으로 사망하고 만다.
 
  
 
==작품==
 
==작품==

2019년 6월 16일 (일) 22:37 판

생애

본명은 최학송(崔鹤松)이고, 호는 서해(曙海)이다. 1901년 1월 21일에 태어나 1932년 7월 9일날 사망하였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집안이 너무 가난해 어려서부터 각지에서 품팔이, 나무장사, 부두노동자 등 최하층 생활을 체험했다. 이러한 체험이 그의 작품의 바탕이 되는 건 훗날의 이야기이다.

1910년 아버지가 간도 지방으로 떠나 어머니와 단 둘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년시절 한문을 배우고 성진보통학교에 3년정도 재학한 것 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소년시절 이광수의 <청춘>, <학지광>을 읽으며 문학에 눈을 떴고, 작가의 꿈을 키웠다. 1918년 간도로 건너가 방랑과 노동을 하며 문학 공부를 계속하였고, 1923년 간도를 나와 회령에서 잡역부 일을 하기도 했다. 1년 뒤인, 1924년 작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노모와 처자를 남겨둔 채 상경하여 이광수를 찾아갔다. 그의 주선으로 양주 봉선사에서 승려생활을 했지만, 두어 달 뒤에 다시 상경하여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였다.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작품 ‘토혈’을 발표하고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고국’을 발표하며 데뷔,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이와 별개로 그의 첫 작품은 이광수의 추천으로 발간한 ‘우후정원의 월광’ 등의 세 편의 시이다. 1925년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였고, 여기에 극도로 가난했던 간도 체험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 ‘탈출기’를 발표함으로써 당시 문단에 충격을 주었고, 동시에 작가로써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에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과 같은 작품들을 발표했고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 동맹, 카프에도 가입했다. 그는 '홍염'. '기아와 살육' 등 카프의 색체에 맞는 소설을 냈으나, 이 작품들은 대부분의 카프파 소설처럼이데올로기가 아닌 개인적인 복수나 살인 등으로 끝나는 형태를 보였다. 이후 단편 갈등을 내고 다른 카프 단원들이‘인도주의적 회색 분자' 라며 비난하자 최서해는 카프를 탈퇴하고매일신보로 이직한다. 매일신보로 이직한 그는 1931년 학예부장 자리까지 승진하기도 했지만, 위 질환으로 사망하고 만다.

작품

소설

수필

작품 경향

최서해의 문학은 간도시절의 유랑경험과 회령에서 잡역부생활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가난과 지주의 착취에 고통받는 가난한 민중의 삶을 닮아내었다.

그의 문학은 총 세가지 정도의 주제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간도로 유랑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고국>(조선문단, 1924)·<탈출기 脫出記>(조선문단, 1925)·<기아와 살육>(조선문단, 1925)·<돌아가는 날>(1926)·<홍염 紅焰>(조선문단, 1927)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함경도 지방의 시골을 배경으로 무식하고 가난한 노동자나 잡역부들의 생활을 그린 소설로 <박돌의 죽음>(조선문단, 1925)·<큰물 진 뒤>(개벽, 1925)·<그믐밤>(신민, 1926)·<무서운 인상(印象)>(동광, 1926)·<낙백불우 落魄不遇>(문예시대, 1927)·<인정 人情>(신생, 1929) 등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 잡지사 주변을 맴도는 문인들의 빈궁상을 그린 소설로 <팔개월 八個月>(동광, 1926)·<전기 轉機>(신생, 1929)·<전아사 錢迓辭>(동광, 1927) 등이 이 계열에 속한다.

연보

연도 내용
1901년 (1세) 함경북도 성진군 임명면에서 빈농의 외아들로 출생.
1905년 (5세) 한동안 함북 성진시 한천리 254번지 김순기(외숙부) 집에서 기거함.
1913년 (13세) 나무 베러 갔다가 남의 산을 태워 놓고 죽게 얻어맞는 등 힘에 부친 일을 함.
1915년 (15세) 시장 거리에 나가 『청춘』, 『학지광』 등의 잡지를 사다가 읽고, 구소설 · 신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읽음. 춘원(이광수)의 글을 읽고 그를 존경하여 동경에 가 있는 그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음.
1918년 (18세) 간도로 이주하여 유랑 생활 시작. 여기서 한때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함. 간도로 가기전 이혼. 간도에서 재혼했으나 두 번째 처는 곧 사망. 부두노동자, 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로 전전함.
1921년 (21세) 7월 22일 세 번째 처와의 사이에서 첫 딸 백금을 서간도에서 낳음.
1922년 (22세) 간도 생활에서 위병이 생긴 듯함. 이후 죽을 때까지 위병에 시달림.
1923년 (23세) 봄에 간도로부터 귀국. 회령역에서 노동 일을 함. 서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함. 파인(김동환)과 서신 연락을 시작함.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여 회령을 떠나 나남 · 경성 · 성진을 떠돌고, 웅기에 있던 여동생의 집에 잠시 머물기도 함.
1924년 (24세) 10월 이광수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 들어가 약 3개월간 기거함. 여기서 『탈출기』도 고치고 일문으로 된 서구 문학을 공부함.

11월 15일 어머니의 환갑날 『살려는 사람들』을 탈고했으나, 발표하지 못하고 후에 『해돋이』로 개제하여 발표함. 고향의 아내는 시어머니와 딸(백금)을 버리고 출분.
1925년 (25세) 2월 『조선문단』사 입사. 방인근 집에서 기거함. 『조선문단』을 통해 작품 발표가 많아지자 일약 중견 작가로 발돋움하여 각종 잡지의 문사 프로필에 소개되기 시작함. 4월 14일 백금이 병사함.
1926년 (26세) 2월 창작집 『혈흔』을 글벗집에서 발간.

4월 8일 문우 조운의 누이 분려와 『조선문단』사에서 결혼식 거행, 명륜동 2가에서 살림 시작.

6월 『조선문단』이 통권 17호를 내고 휴간되자 『현대평론』 문예란 담당 기자로 당분간 종사.
1927년 (27세) 1월 1일 장남 백(白) 출생. 1월 범 문단 조직으로 발족한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 · 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음. 1월 방인근으로부터 남진우(우당)가 인수한 『조선문단』사에 다시 입사. 『조선문단』이 복간됨과 동시에 그 편집 책임을 맡고 추천 위원이 됨. 『조선문단』 3월호에 계용묵의 『최서방』을 추천함.

5월 5일 『문예시대』사 주최 문예 강연회에서 소설작법론 강연. 서울 기생들의 잡지 『장한』의 편집을 맡기도 함.
1928년 (28세) 8월 26일 개최 예정인 조선프로예술동맹 전국대회에서 조중곤 · 이기영과 함께 재무에 피촉됨. 『중외일보』 기자가 됨.
1929년 (29세) 2월 둘째 딸 출생.

5월『조선일보』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참석. 『신생』의 문예 추천 작가로 위촉됨. KAPF 탈퇴. 가을에 『매일신보』 기자가 됨.
1930년 (30세) 이른 봄 최독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이 됨. 두 살 된 둘째 딸 사망. 차남 택 출생. 국악계의 명창 이동백 · 김소희, 가야금 병창으로 유명한 송만갑 등을 초청하는 등 국악에 관심을 보임. 틈만 나면 장안의 관상가는 물론 심지어 무꾸리에도 남다른 신명과 열을 올리며 찾아다님. 고영환 · 이승만과 함께 체부동의 노국공사가 살던 집을 공동으로 세내어 삶.
1931년 (31세) 5월 창작집 『홍염』을 『삼천리』사에서 간행. 10년 만에 부친이 찾아와 몇 달간 머무르다 다시 간도로 떠남.
1932년 (32세) 5월 4일 『삼천리』사가 주최한 문인 좌담회에 김동인 · 김원주(金元周) · 방인근 · 이광수 · 현진건 · 최상덕 · 김억 · 이익상 · 김원주(金源珠)와 함께 초대됨.

위병이 부쩍 심해져 6월 초순 자리에 눕게 됨. 병명은 위문협착증. 6월 말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

7월 6일 수술을 받기 위해 의전병원으로 옮김. 7일 대수술 뒤 과다한 출혈. 수술 중 이익상, 죽마고우 최문국, 동료 박상엽 등 3인이 1200그램의 피를 수혈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함.

7월 9일 오전 4시 20분 처남 조운, 의사 정민택, 누이동생, 이승만 그 외 간호원 2, 3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둠. 당시 가족은 어머니, 부인, 아들 백(白)과 택이 있었음.

7월 11일의 장례식은 한국 최초의 문인장으로 장지는 미아리 공동 묘지. 이광수 · 김동인 · 염상섭 · 김팔봉 · 김억 · 방인근 · 심훈 · 박종화 등과 그 외 많은 문인이 운집하여, 이처럼 많은 문인이 한곳에 모이기는 근래에 없었던 일이라고 전해짐. 자동차도 4,50대나 몰려 장관을 이룸. 관을 운구차에 옮기는 것을 이익상 · 김동환 등 6인이 하고, 관 위에 덮는 영정에는 이병기가 글을 씀. 관을 묻고 그 위 콘크리트한 곳에는 김운정이 ‘서해 최학송지구(曙海 崔鶴松之柩)’ 라고 씀.

7월 23일 오후 4시 서울 백합원에서 이광수 · 김동환 · 박종화 · 주요한 · 양건식 · 이병기 · 방인근 등이 발기하여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 결성.
1933년 7월 8일 오후 8시부터 생전의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견지동(堅志洞)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소기(小忌) 추도식을 거행.
1934년 6월 12일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아리의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고 추도회 개최. 묘는 1958년 9월 25일 망우리 공동 묘지로 이장됨.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년 기념회 개최. 박웅걸 문화상, 조영출 문예총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 공훈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
2003년 12월 4일 서울 중랑구 망우동 산 57-1번지 망우리 공원 묘지에서 묘지 발견.
2004년 7월 31일 오후 4시 묘지 입구의 도로변에 문학비 세움.

관련인물

이광수

1924년 최서해가 작가로 성공하기 위하여 이광수를 찾아감.

그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 봉선사에 약 3개월간 머무르며 서구문학을 공부함.


이익배, 김광배

1927년 조선 문예가 협회에서 이들과 함께 간부직을 맡음.

관련단체

조선 문단사

조선문단사는 조선 문단을 발행한 기관이다. 조선 문단은 1924년 10월 창간되어 1936년 6월 통권 26호로 종간되었다. 1∼4호까지는 이광수(李光洙)가 주재하였고, 1∼17호까지 방인근(方仁根)에 의하여 편집 겸 발행되다가 휴간되었다. 1927년 1월 18호부터 남진우(南進祐)에 의하여 속간되었으나 다시 휴간되었고, 1935년 2월 통권 21호가 속간 1호로 다시 발간되어 26호까지 발행되었다. 방인근의 사재로 시작, 처음부터 우리 민족문학 옹호를 표방하였다. 자연주의 문학을 성장시켰으며, 민족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하고, 당시 한국문단을 휩쓸던 계급주의적 경향문학(傾向文學)을 배격하였다.


카프

1925년 8월에 결성된 경향적(傾向的)인 예술단체.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약칭으로 에스페란토로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이라고 표기한다. 카프는 의식(意識)과 조직면에서 볼 때는 신경향파(新傾向派)와는 확연하게 다른 목적의식(目的意識)과 정치성(政治性)을 띤 문학운동의 조직체였다. 또한 카프는 절충파와의 사이에 「내용과 형식」이라는 또 다른 논쟁을 벌였으나, 1928년이 되면서 작품 실천의 필요에 따라 「내용」만을 주장하던 그들도 「형식」의 문제를 중요시하여 카프 내부의 형식논쟁까지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그 목적으로 부르짖고 나섰던 카프는 1925년 후반기부터 1935년 6월까지 수많은 논쟁과 대립의 자취를 신문학사(新文學史)에 남기고, 1931년의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전후한 일제 식민지하의 암담한 현실 속해 그해 6월 박영희 · 김기진 등 카프의 맹원 70여 명이신간회(新幹會) 해소(解消) 문제로 점거된 제1차 검거사건(檢擧事件)과 1934년 박영희가 <동아일보(東亞日報)> 신년호에 성명한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며 상실한 것은 예술자신이었다」는 이른바 전향기(轉向期)의 유명한 퇴맹(退盟)선언, 같은 해 5월에 있었던 」 「신건설(新建設)」 사건으로 발단된 제2차 검거사건 이후 1935년 6월 김기진카프의 문학부 책임자로 「카프 해산계」에 서명 · 날인 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매일신보

매일신보는 일제강점기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되던 한국어 일간신문이다.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裵說:Ernes Thomas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일제가 사들여 국권침탈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 두 자를 떼고 《매일신보(每日申報)》로 개제한 것이다. 경영상으로는 일어판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에 통합시켜서 《경성일보》의 일본인 사장과 편집국장 밑에 두어 일제의 한국통치를 합리화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논조로 발간되었다.

네트워크그래프

최서해 그래프.png

관련항목

주어(S) 목적어(O) 관계:A는 B를 ~하다(P) 비고
최서해 간도 A는 B에서 유랑생활을 했다
최서해 이광수 A는 B의 도움으로 데뷔하였다
최서해 동아일보 A는 B에 작품을 발표했었다
최서해 조선문단 A는 B에서 데뷔하였다
최서해 현대평론 A는 B의 담당기자였다
최서해 고국 A는 B로 데뷔하였다
최서해 유랑민 A는 B의 이야기를 썼다
최서해 카프(KAPF) A는 B에 가입했었다
최서해 카프(KAPF) A는 B에게 비난받았다
최서해 기아와 살육 A는 B를 썼다
기아와 살육 최서해 A는 B의 대표작이다
최서해 탈출기 A는 B를 썼다
최서해 탈출기 A는 B로 인기를 얻었다
탈출기 최서해 A는 B의 경험을 그려내었다
탈출기 최서해 A는 B의 대표작이다
최서해 봉선사 A는 B에서 생활했었다
우후정원의 월광 최서해 A는 B의 첫 작품이다
최서해 매일신보 A는 B로 이직하였다
최서해 신경향파 A는 B의 작가였다
최서해 봉선사 A는 B에서 생활했었다
최서해 매일신보 A는 B로 이직하였다

참고문헌

최서해의 삶과 문학 연구

작성자 및 기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