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이민자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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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유럽은 국가 간 이동이 용이한 지형적인 특성과 장기간의 경제호황, 그리고 노동력의 부족으로 오랜 이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긴 이민역사를 가진 프랑스는 19세기에는 주로 이웃나라인 벨기에,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등에서, 그리고 20세기에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포르투갈로부터 많은 이주민들을 받아들였다. 특히나 프랑스는 1,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감소된 인구를 증가시키고 전후복구를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을 계속적으로 적극 추진하였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극우파인 국민전선의 당수 장 마리 르펜의 놀라운 선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비교적 개방적인 이민국으로, 유럽에서 독일과 함께 이민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국가이다. 프랑스 국립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730만 명의 사람들은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이민배경의 부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전체인구의 11%에 해당하지만 뿌리 깊은 이민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프랑스에 유입된 대부분의 외국인 이주민들은 과거 프랑스 식민국가 출신인 무슬림들이었다.

이들은 유럽계 이주민들과 달리 인종적・문화적・종교적으로 이질적이었으며 이들의 프랑스 사회로의 통합의 어려움은 오늘날 프랑스의 정치적 사회적 주요이슈가 되고 있다. 100년 이상의 이민역사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가 이주민들을 프랑스 사회의 시민으로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무슬림 이주민들의 유입배경, 그리고 시기별 실시되었던 이민정책의 변천과정을 살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프랑스의 지금까지의 역사와 더불어 최근 다문화사회에 접어들며 발생한 프랑스의 정세를 정리해보았다.
그 중에서도 2022년 재선에 성공한 에마뉘엘 마크롱과 근 5년간의 마크롱 정부의 이민 정책들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이민 정책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콘텐츠를 제작하게 되었다. 해당 콘텐츠는 제작하는 과정에 있어서 이해를 돕기 위한 많은 사진과 도표 영상과 같은 기능을 널리 활용하여 관련 지식과 관심이 없더라도 흥미롭게 볼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 콘텐츠는 2022년 6월 30일부터 2022년 9월 2일까지 제작되었으며 조사를 하는 과정에 있어서 한성대학교 위키 외에도 다양한 콘텐츠를 접할 수 있도록 신뢰도를 바탕으로 한 위키 사이트 링크를 첨부하였다.
프랑스가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게 된 배경, 특히 프랑스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있는 무슬림 이민자 유입을 바탕으로 한 프랑스의 사회통합 실패를 알아보려 한다. 말은 사회통합이라 해놓고선 보이지 않는 차별로 갈등은 점점 심화되어갔고, 프랑스의 24대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의 17년 만에 정권교체로 프랑스에 나타나는 변화까지 살펴보려고 한다. 다음으로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지난 5년을 살펴본 뒤 현재 프랑스 이민정책의 문제점과 우리나라의 이민정책까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2022년 디지털인문정보학 트랙 졸업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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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이민사와 이주민정책

프랑스 이민사와 이주민 유입

19세기말~제1차 세계대전

1860년 이후의 프랑스의 출산율 저하로 인해 1881년 당시에는 프랑스 총 인구인 약 3천7백만 명 대비 약 100만 명(전체인구의 2.7%)이 넘는 외국인들이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때 프랑스 이주민들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사 람들은 주로 벨기에이탈리아 출신들이었다. 프랑스의 1851년 인구조사에서는 12만 8천 명의 벨기에 인들이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는 총 거주 외국인의 1/3에 해당했으다. 또한, 1880년에는 전체 외국인의 40%인 48만2천명에까지 달했다. 이들은 주로 섬유산업에 종사하거나 농업이나 토목 그리고 채석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1901년 인구조사에서는 벨기에 인들은 서서히 감소하며 결국 이태리인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탈리아 이주민들은 1850년부터 대규모로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1875년부터 비약적으로 늘기 시작하면서 전체 외국인의 20%에 해 당하는 16만5천 명까지 달했다. 이탈리아로부터의 이주는 계속 되었으며,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프랑스에는 이미 약42만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살고있었다. 그리고 한편 19세기 말의 스페인의 경기침체는 스페인인들의 프랑스와의 국경 부근으로의 이주로 이어졌는데, 이후 1911년 당시 약10만 6천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프랑스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프랑스와의 국경지역인 남서부에 거주했다. 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5년에서 1918년까지 프랑스에는 44만 명의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그리고 스페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유럽뿐만 아니라 멀리 중국에까지 프랑스에 파견할 노동자를 모집했다. 프랑스는 1916년 중국당국과 계약을 맺어 중국의 중계회사를 통해 약 14만 명의 중국인들을 유입했으며, 이들 중 10만 명은 영국군대에, 그리고 4만 명은 프랑스 공장에 배정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의 식민통치국가 내에서도 원주민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모집하고 있었는데, 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북아프리카, 인도차이나, 마다가스카르에서 2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1920~1930)

전쟁으로 상실된 노동력을 확보하고 전후를 복구하려는 경제적 필요성으로 이주민들은 급속히 증가했으나 정치적 상황들 역시 프랑스로의 대규모 이주의 주요요인이 되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이탈리아로부터 대규모의 정치적 이주가 있었는데, 이들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들을 피해 탈출한 반파시스트들이었으며, 이는 첫 번째 대규모 정치적 유입이었다. 또한, 1919년 당시 헝가리의 쿤 벨러(Kun Béla)를 중심으로 한 공산당 혁명의 억압을 피하기 위해 망명한 수많은 헝가리 정치인들이 프랑스에 들어왔으며,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1917년과 1922년 사이 정치적 망명을 한 많은 러시아인들이 프랑스에 합류했다. 같은 시기, 동유럽과 중부유럽 출신의 많은 유대인 이주자들도 프랑스에 들어왔는데, 이들은 대부분 폴란드 출신이었다. 그리고 터키 유대인 또한 1914년 이전부터 러시아 유대인들과 프랑스의 입국에 합류했다. 한편 1920년대에 알제리로부터의 첫 번째 대 이주의 물결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들어온 이주민들은 대부분 알제리의 극빈한 지방이었던, 카빌리아지역의 농부 출신들이었다. 이러한 추세로 1931년 국외에서 프랑스로 유입된 이주민들의 수는 전체인구의 6.6%인 약 270만 명에 달했으며 이로써 프랑스는 인구대비 이주민의 비율로 따져 보았을 때 세계 제1의 이민국가가 되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의 산업에서는 소규모 기업에서 대규모의 기업으로의 전환이 있었는데, 이는 오로지 외국인 노동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민은 프랑스의 근대산업의 출현에 있어 그 중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표1.인구조사 결과
인구조사연도 이주민 수(천 명) % 총 인구수 출처
2014 5,967 9.1 65,907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2009 5,434 8.5 64,305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1999 4,387 7.3 60,187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1990 4,166 7.4 56,652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1982 4,037 7.4 54,296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1975 3,887 7.4 52,599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1968 3,281 6.6 49,655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1962 2,861 6.2 46,459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1954 2,293 5.4 42,781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1946 1,986 5.0 39,848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1936 2,326 5.6 41,183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1931 2,729 6.6 41,228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영광의 30년(1945~1975)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노동인력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자 프랑스 당국은 1945년 국립이민국의 설립과 함께 다른 나라와의 협정을 통해 노동시장의 다각화를 꽤했다. 그리고 1950년부터 사실상 프랑스는 손님 근로자프로그램을 통해서 노동이주를 개방 했는데, 1961년부터 스페인과의 협정을 시작으로 1963년 모로코, 튀니지, 포르투갈과, 1965년에는 유고슬라비아터키와 노동협정을 체결하여 여러 나라에서 필요한 인력의 수급을 위해 노력했다. 이 시기 프랑스 이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1960년 이후부터의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출신의 마그레브인의 대거유입이다. 1946에서 1960년대까지 프랑스로 들어오는 이주민들은 대부분 스페인이탈리아프랑스의 이웃국가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주요 노동력을 차지했던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1950년대에 시작된 자국의 경제부흥 정책으로 대거 귀국함으로써 일손이 부족해지자 프랑스포르투갈 이민노동자를 비롯하여 옛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마그레브지역 출신인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등에서 이민노동자들을 급격히 들여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그들의 식민지에서 철수하여 이후 다른 유럽국가들 간의 경제관계의 강화에 주력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후 ‘영광의 30년(les Trente Glorieuses)’동안 과거 식민지로부터 이주민들을 불러들임으로써 프랑스의 이주패턴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아주 상이함을 알 수 있다.


표2.국적에 따른 프랑스의 외국인 1946-1999년
이주민 유출국 1946 1954 1962 1968 1975 1982 1990 1999
100 100 100 100 100 100 100 100
유럽 국적 88.7 79.1 72.2 71.6 60.7 47.6 40.6 40.9
독일 1.4 3 2.1 1.7 1.2 1.2 1.5 2.4
벨기에 8.8 6.1 3.6 2.5 1.6 1.4 1.6 2.1
스페인 17.3 16.4 20.4 23.2 14.5 8.8 6 4.9
이탈리아 25.9 28.8 29 21.8 13.4 9.2 7 6.2
폴란드 24.3 15.3 8.2 5 2.7 1.7 1.3 1
포르투갈 1.3 1.1 2.3 11.3 22 20.7 18.1 17
유고슬라비아 1.2 1 1 1.8 2 1.7 1.5 1.5
기타 8.6 7.5 5.6 4.3 3.1 2.9 3.7 5.8
러시아 2.9 2 1.2 0.7 0.4 0.2 0.1 0.4
아프리카 국적 3.1 13 19.7 24.9 34.6 42.9 45.4 43.5
알제리 1.3 12 16.2 18.1 20.6 21.7 17.1 14.6
모로코 0.9 0.6 1.5 3.2 7.6 11.9 15.9 15.5
튀니지 0.1 0.3 1.2 2.3 4.1 5.1 5.7 4.7
기타 0.8 0.1 0.8 1.3 2.4 4.2 6.7 8.7
아메리카 국적 0.5 2.8 4.1 1.1 1.2 1.4 2 2.5
아시아 국적 4 2.3 1.7 1.7 3 7.8 11.8 12.6
터키 0.4 0.3 (a) 0.3 1.5 7.8 11.8 12.6
기타 3.6 2 1.7 1.4 1.6 4.5 6.3 6.3
오세아니아&국적 불분명 0.8 0.8 1.1 0 0 0.1 0.1 0.1

이민 중지 공식선언~현재

1970년 대 중반의 프랑스 정부가 무슬림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시행한‘이민 제로 정책'과 ‘가족재결합’ 정책은 프랑스의 이민패턴에 주요한 변화를 초래했는데, 첫 째로는 ‘이민동기’에 있어서의 변화이다. 이전의 프랑스로의 대부분 이주의 동기는 노동이 주였으나,‘가족재결합’에 의한 이민이 프랑스 이주의 가장 큰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특히 무슬림 여성들과 청소년들의 증가라는 필연적 인구 통계학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두 번째는 ‘가족재결합’ 정책의 시행은 무슬림 이주민들이 가족을 동반한 이주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무슬림들이 프랑스에서 가족을 이루고, 그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프랑스 사회에 영구적으로 정주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이민정책

이민과 이주민들에 대한 프랑스의 접근방식은 종종 영국네덜란드의 다문화적인 입장과 대응적인 것으로 언급된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평등, 균질성, 그리고 세속주 의라는 프랑스의 공화주의 원칙에 따라 이주민들을 동화시켜 왔다. 그러나 시민들의 평등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소수공동체들은 수년 동안 점점 더 고립되어 왔다. 그리고 2005년에 도시외곽 지역의 소요사태는 프랑스가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과 사회적 배제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선택을 고려하게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통 합하기에 가장 쉬운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로 이민을 제한하기에 이른다.

동화주의

프랑스의 무슬림 이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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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이주민과 국가정체성

라이시테

‘라이시테(laïcité)’는 세속화의 프랑스식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프랑스 공화주의의 구현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라이시테는 프랑스 헌법의 핵심개념으로 프랑스 헌법 제1조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세속공화국임을 명시한다.

히잡

특히 2004년 ‘히잡착용 금지법’은 프랑스 사회의 무슬림이라는 새로운 도전과 함께 프랑스 국가정체성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양되면서 ‘라이시테 정신’이 무슬림들을 배제 하는 선제적인 행동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음을 반영하는데, 이것은 정치적인 논의에만 머무르던 이슬람교과 이주민들의 문제가 히잡사건을 계기로 종교를 상징하는 의복 착용금지의 법체계화를 통해 계속적인 이민정책의 강경화 즉, 동화주의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국가정체성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는 이미 설립된 종교집단, 즉 가톨릭교, 개신교, 또는 유대교와 의 상호작용을 용이하게 하는 제도적인 구조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에게는 이와 같은 인정이나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것은 특히 프랑스에서 문제가 되는데, 프랑스의 세속주의에 대한 강한 고수는 무슬림들의 종교적 관행을 위한 지원을 더욱 어렵게 한다. 그리고 신앙심이 깊은 무슬림들이 현대 유럽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은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제대로 살아 가는 것을 어렵게 한다. 특히 이것은 프랑스에서는 악이 되는데, 공적으로 세속주의를 표명한 프랑스에서는 그다지 크지 않은 종교의 표현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국가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민의 정치화

2005년 파리 소요사태는 2007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터져 나온 프랑스 최대의 사회문제였다. 이에 대한 처리문제는 차기 대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으며,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는 소요사태에 필요이상의 강경책을 취했다. “인간 쓰레기들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외쳤던 그는 프랑스 신자유주의 개혁의 실패에 대한 사회적 반발을 무마하는 데에 프랑스 주류사회와 무슬림 사회를 양분하는 패러다임을 활용하여 무슬림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집권 후에도 그는 ‘이민부’를 중심으로 ‘선택적 이민’, ‘가족재결합 시 DNA검사’, ‘2009년 국가정체성 대토론회’ 그리고 ‘부르카 금지법’등을 통과시키면서 국가정체성과 관련된 정책들을 강경하게 추진했다. 2003년 법은 사르코지의 이민정책의 개 혁을 시도한 첫 번째 법안으로 불법체류자의 근절을 위한 것이었다면, 특히 2006년 법은 사르코지의 이민정책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선택이민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다.

무슬림의 사회적 배제

방리유 사건

‘방리유’라 불리는 프랑스 주요도시들의 교외지역은 이주와 이민자들로부터 비롯된 치안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게 되었다. 방리유 지역은 많은 이주민들과 무슬림 배경을 가진 자들의 고향이며, 이곳에 거주하는 이주민들은 빈곤, 게토화, 실업, 그리고 엄청난 차별에 직면한다. 또한 이들은 자주 프랑스 경찰들의 괴롭힘의 대상이 된다. 결국, 2005년 10월 27일 클리시수부아(Clichy-sous-bois)에서 세 십대 소년이 경찰의 추격을 피해 변전소에 들어갔다가 두 명이 감전되어 사망하고 한 명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최초의 폭력 사태는 두 소년이 경찰로부터 도망치다가 죽게 되었다고 생각한 클리시수부아 청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경찰과 정부는 경찰이 이들 소년을 추격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감전 사망 사고 이후 이어진 폭동에서 진압 경찰이 모스크에 최루탄을 발사하고 당시 내무부 장관인 니콜라 사르코지의 강경 발언이 이어지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매일 밤 주차된 차량, 운행 중인 버스, 창고, 보육원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방화와 기물 파괴 행위가 발생하였다. 한동안 클리시수부아가 위치한 센생드니주를 중심으로 파리 교외 지역에 사건이 집중되었으나 곧 프랑스 전국의 이민자 집중 지역들로 소요 사태가 확산되었다. 2005년 11월 5일 밤 최초로 파리 중심가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차량 방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민의 치안 이슈화

프랑스의 많은 무슬림 이주민들은 몇 세대에 걸쳐 프랑스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주민들, 심지어 그들의 2・3세대들은 비 이민출신의 프랑스인들보다 실업률이 80%나 더 높다. 이것은 최근의 이주의 위기가 설명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뿌리 깊고,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문제를 가리킨다. 특히 테러를 중동, 아프리카 등 프랑스 밖에서 온 사람들과 연계시킴으로써 국내 문제를 외면하기도 한다. 특히 무슬림 이주민들과 그들의 지역사회를 범죄, 실업, 폭력과 치안의 위협으로 간주함으로써 이러한 지역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위협과 불안정성에 대한 인식의 결과로 무슬림 이주민에 대한 불공평한 편견을 키우는 결과를 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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