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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2.8 독립선언|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본국에 정하여 국내외에서 동시 궐기할 것 말함, [[신한청년당]] 조직에 가담, [[3.1 독립선언서]]의 제1보를 기사화하여 보토케 함, 망국청년들이 주관한 '우리 소식'에 논설을 기고, 소장파의 중심이 되어 임시의정원 조직에 협력, 임시의정원 평안도대표로 선출,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주임 맡음, 임시정부 공부국장과 주요한의 협력을 얻어 주간《독립》 발행,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 겸임, 희곡 '순교자' 지음, [[오산학교]] 제자를 소재로 ‘H군에게’를 집필, [[안중근]] 의사 부인 초청연에 참석, 흥사단의 임시반장으로 임명, 사료편집위원회 해산, [[독립신문]]의 운영난으로 민족운동의 장래와 미래에 대해 번민, '너는 청춘이다'와 같은 시 그리고 평론을 집필하여 《창조》에 보냄
 
|1919||[[2.8 독립선언|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본국에 정하여 국내외에서 동시 궐기할 것 말함, [[신한청년당]] 조직에 가담, [[3.1 독립선언서]]의 제1보를 기사화하여 보토케 함, 망국청년들이 주관한 '우리 소식'에 논설을 기고, 소장파의 중심이 되어 임시의정원 조직에 협력, 임시의정원 평안도대표로 선출,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주임 맡음, 임시정부 공부국장과 주요한의 협력을 얻어 주간《독립》 발행,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 겸임, 희곡 '순교자' 지음, [[오산학교]] 제자를 소재로 ‘H군에게’를 집필, [[안중근]] 의사 부인 초청연에 참석, 흥사단의 임시반장으로 임명, 사료편집위원회 해산, [[독립신문]]의 운영난으로 민족운동의 장래와 미래에 대해 번민, '너는 청춘이다'와 같은 시 그리고 평론을 집필하여 《창조》에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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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백조지》 필진 한 사람으로 참여,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문 석전 박한영 찾아가 서예와 한시를 배우고 불교전문강원에도 출입, 경신학교 교사로 영어를 가르침, [[수양동맹회]] 조직, 조선 총독 사이코 마코토와 면담, 아베 미쓰이에와 접촉,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 얼마 후 퇴사, [[흥사단]] 원동위원부 창립 주관, [[주요한]]과 함께 안창호의 연락을 받고 동우구락부, [[수양동맹회]] 발족 지시, [[최학송|서해 최학송]]과 서신 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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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동우회사건 피의자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신병 재발로 병감 옮겨짐
 
|1937||동우회사건 피의자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신병 재발로 병감 옮겨짐

2022년 6월 15일 (수) 00:41 판




개요

최남선과 더불어 신문학 초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대표적인 문인이며 일제강점기무정」,「소년의 비애」,「방황」등을 저술한 소설가,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1905년 8월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뽑혀 이듬해 일본에 있는 메이지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하게 된다. 이광수는 망명 도중 오산에서 신채호와 만나게 된다. 1911년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자 학감으로 취임해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된다. 그런데 기독교계인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생물 진화론톨스토이를 가르친 것이 빌미가 되어 교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와세대 대학에서 공부하며 유학생 잡지 『학지광』을 편집했다. 1918년 북경에서 조선청년독립단 조직에 가담했다. 1921년 귀국 이후 국내에서 「허생전」, 「재생」, 「마의 태자」, 「단종애사」, 「이순신」, 「흙」, 「그 여자의 일생」, 「사랑의 동명왕」 등의 소설과 「문사와 수양」, 「민족개조론」, 「민족적 경륜」 등의 논설을 써서 발표했다. 1939년에는 친일 문학인들의 모임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이후 줄곧 친일 연설을 하며 전국을 순회했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로 지목되어 곤란을 겪었고, 1949년 반민법에 걸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6·25전쟁 중인 1950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7월 12일 납북된다. 이후 강계에서 30여km 떨어진 산악지대의 강추위 속에서 심한 동상에 걸리고, 건강이 더 악화된다. 이후 북한 만포의 한 병원에 있다가 1950년 10월 25일 생을 마감한다.

연보

연도 약력
1892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리 940번지 돌고지에서 전주 이씨 문중 5대 장손으로 출생.
1894 가세가 기울어 극도의 생활고를 겪음, 아명은 보경(寶鏡)
1896 한글과 천자문 깨우침.
1902 부모의 의사로 향리 김씨 집에 청혼하였으나 경제적 이유로 거절당함, 부와 모가 콜레라로 별세하게 되며(8일차) 3남매가 고아가 됨, 외가와 재당숙 집을 전전 기식하며 방랑생활
1905 일진회와 접촉하는 한편 개화사상에 눈을 뜸,진남포에서 화륜선 편으로 인천을 거쳐 상경하는 길로 삭발, 일진회에서 세운 광무학교 전신인 소공동학교의 일여교사로 채용, 광무학교가 설립되자 학생으로 공부,일어교사를 통해 일어를 실습하며 산술을 배우다 일진회의 유학생 9명 중에 선발, 손병희를 일본에서 봄
1908 톨스토이에 심취, 무저항주의에 공감,홍명희의 소개로 육당 최남선을 알게 됨, 홍명희의 소개로 서울에서 정인보와 알게 됨
1910 여행기 '여행의 잡감'을 발표,《소년지》에 '어린희생'을 연재, 향리의 오산학교 교주 남강 이승훈의 초청으로 동교의 교원이 됨.(김소월 등의 담임 맡음), 오산학교 교가 직접 작사, 조부 별세, 향리 지인의 중매로 6월 백혜순과 정혼, 집을 용동으로 옮기고 야학을 열며 남강의 매상촌운동의 선봉에 섬, 망명 도중 오산에 들른 단재 신채호와 알게 됨, '나의 자각한 인생' 발표,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 발표
1911 105인 사건으로 오산학교 교주 남강이 구속, 학감으로 취임하고 오산학교의 실질적 책임, 하기 방학에 상경하여 최남선 집에 유하며 시국을 담론, 비밀 독립운동 단체 조선학회 조직
1918 폐병 걸림,《청춘》지에 '소년의 비애', '윤광호', '방황' 등 탈고 및 발표, 논문 '의지론적 진화론' 당국에 압수, 9월 매일신보에 '신생활론'을 연재하여 물의를 일으킴, 파리평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에 북경에 있다가 급거 귀국, 3.1 운동의 선봉이 되게 함, 재일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 백혜순과 이혼
1919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본국에 정하여 국내외에서 동시 궐기할 것 말함, 신한청년당 조직에 가담, 3.1 독립선언서의 제1보를 기사화하여 보토케 함, 망국청년들이 주관한 '우리 소식'에 논설을 기고, 소장파의 중심이 되어 임시의정원 조직에 협력, 임시의정원 평안도대표로 선출,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주임 맡음, 임시정부 공부국장과 주요한의 협력을 얻어 주간《독립》 발행,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 겸임, 희곡 '순교자' 지음, 오산학교 제자를 소재로 ‘H군에게’를 집필, 안중근 의사 부인 초청연에 참석, 흥사단의 임시반장으로 임명, 사료편집위원회 해산, 독립신문의 운영난으로 민족운동의 장래와 미래에 대해 번민, '너는 청춘이다'와 같은 시 그리고 평론을 집필하여 《창조》에 보냄
1922 《백조지》 필진 한 사람으로 참여,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문 석전 박한영 찾아가 서예와 한시를 배우고 불교전문강원에도 출입, 경신학교 교사로 영어를 가르침, 수양동맹회 조직, 조선 총독 사이코 마코토와 면담, 아베 미쓰이에와 접촉,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 얼마 후 퇴사, 흥사단 원동위원부 창립 주관, 주요한과 함께 안창호의 연락을 받고 동우구락부, 수양동맹회 발족 지시, 서해 최학송과 서신 왕래
1937 동우회사건 피의자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신병 재발로 병감 옮겨짐
1939 '무명' 《문장》에 발표, '세조대왕' 집필에 착수, '꿈' 집필, '무정'이 영화화되어 상영, '이광수단편선' 간행, 조선문인협회 회장 선출, 전선 병사 위문대, 위문문 보내기 행사 주도, 북지황군 위문 사절 후보 선거 실행위원, 《삼천리》에 '문단사절의 의의'발표, 조선총독부 도서과가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
1940 가야마 미쓰로 창씨개명, '내선일체'와 '조선문학' 발표,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 게재, 황민화운동 지지, '의무교육과 우리의 각오'
1949 반민법'에 육당과 함께 서대문형무소 수감
1950 '사랑의 동명왕', 서울, 유작 '운명' 집필, 서울대문리대 불문과에 입학, 효자동 집에 공산군에 의해 차압됨, 납북됨, 10월 25일 폐결핵 악화로 사망

작품

이 이외에도 허생전, 원효대사, 어린벗에게, 방황, 가실, 거룩한 죽음 등이 있다.


초판이나 원본의 사진이 남아있지 않은 많은 작품이 있지만 현재 많은 출판사에서 이광수의 작품이 재출판 되고 있다.

사상과 신념

1922년 5월 이광수가 종합지『개벽(開闢)』에 발표한 논설이다. 1920년대 일제가 문화정치에서 허용하고 제시하였던 사회운동의 방안은 문화운동이었다. 문화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구체적인 강령으로 일제는 ‘참정권 획득 청원’, ‘실력양성’, ‘민족성 개조’의 세 가지를 내세웠다. 이 내용은 친일파, 예속자본가에게 뿐만 아니라 민족개량주의자에게도 획기적인 환영을 받았다. 1920년대 일제의 문화정치 아래에서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먼저 민족성 개조를 추진하였는데, 민족개조론이 그 정신적·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그들은 다음 단계로서 일제가 허용한 실력양성운동, 참정권 획득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궁극적으로 독립을 포기한 일제지배 안에서의 자치를 주장하였다.

민족개조론이광수의 사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글이다. 글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부분에서는 민족개조의 의의와 역사, 두번째 부분에서는 민족개조의 취지와 가능성, 세번째 부분에서는 민족개조의 내용과 방법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도덕적 허위를 배척하여 진실한 인간이 되는 일이 하나이며, 이를 위한 단체를 조직하여 멸사봉공의 정신을 기르는 일이 다른 하나이다. 이러한 주지의 민족개조론은, 이광수 자신이 이 글의 서두에서 암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도산 안창호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 시기의 또 다른 논설 「중추 계급과 사회」(1921), 「소년에게」(1922) 등에서부터 「민족적 경륜」(1924)을 거쳐 1930년대 『동광』지에 실린 여러 논설에 이르기끼지 수미일관하게 관철되고 있다.

또한 이광수는 수양동맹회와 수양동우회 활동을 주도함으로써 스스로 사상의 실천에 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족개조론」은 투쟁적인 독립운동에 대해 명백한 거부의 태도를 보이고 1910년대까지의 민족운동의 의의를 부정함으로써 격렬한 비판과 반론을 야기하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으며, 민족개조는 곧 민족성 개조라는 주지를 강조하기 위해 민족의 정신적 타락을 강조함으로써 일제의 침략 논리와 상통하는 논리적 모순을 노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순이 본격화된 것은 1930년대로, 이는 민족개조론의 논리가 궁극적으로는 자민족중심주의, 더 나아가서는 제국주의와 동일한 논리적 지평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개조론에 등장하는 도덕에 대한 강조가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한 수단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제국주의의 침략논리, 곧 힘의 윤리와 다를 것이 없으며, 반대로 도덕에 대한 강조가 그 자체로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거기에는 그 어떤 민족의식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이광수가 택하는 길은 도덕을 종교의 차원으로까지 고양시키는 것인데, 1930년대 중반 이후 이광수가 보여주는 불교에의 경도가 그것이다.

독립운동과 친일활동

이광수는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의 당원으로 일본에 파견된다. 도쿄에서 재일한국유학생을 만나 2.8 독립선언문을 기초한다. (백관수가 낭독했던 2.8독립선언서를 이광수가 작성하였다.) 그는 도쿄에서 유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대해 모의하였고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2.8 독립선언을 발표한다. 그 뒤 이광수는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하게 된다.


상하이 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한 이광수는 임시정부 공보국장과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을 겸하며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그는 독립신문의 사장겸 주필, 편집국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잡지 독립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 시기 이광수는 애국계몽적 논설을 주로 쓰며 임시정부의 활동을 알리고,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독립에 대한 열망, 우수한 민족의 문화를 소개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또한 이광수는 임시정부활동 당시 "독립국민의 자격자를 키우라"는 실력양성론을 주창하는 안창호에게 감회하여 1920년 흥사단에 가입하게 된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던 조선대표들이 출입조차 거부당한것과 일본의 승전과 날로 강해지는 국력과 위상을 보며 이광수는 희망을 독립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에서의 빈곤한 삶과 임시정부의 재정난, 갈등 그리고 독립에 무관심한 조선 민중들을 보며 그는 점차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고, 1921년 결국 귀국길에 오른다. 안창호가 이광수의 귀국을 거듭 만류하였으나 이광수는 결국 귀국하였다.


  • 전향과 친일활동

1937년 이광수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인해 안창호와 함께 체포, 서대문 형무소수감되었다. 수감 도중 1938년 3월 10일 스승격이었던 안창호가 수감생활 도중 병사하자 이광수는 큰 실망에 빠지게 된다. 불면증과 신경증으로 고통을 받으며 재판중이던 이광수는 1938년 11월에 병 보석을 신청하였고 전향을 선언한다. 그리고 바로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된다. 전향 후 이광수는 본격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직에 올랐으며 협회에서 전선병사 위문문, 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또한 같은 해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 시행을 발표하자 이를 지지하는 공식성명을 내고 동참할것을 선언하였다. 그는 경성일보창씨개명에 적극 동참하자는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1940년 매일신보가야마 미쓰로라는 창씨개명 발표하고, 자신의 창씨개명을 합리화 하였다. 1940년에는 매일신보에「국민문학의 의의」를 개제하여 황민화운동을 지지하는등 이광수는 언론활동, 선전활동을 통해 1944년 양주로의 은둔생활 전까지 지속적으로 친일활동을 하게된다. 이광수는 광복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수감된 뒤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조선총독부일본 당국으로부터 참정권을 얻어낸 뒤에 자치권을 얻고, 일본 정부의 조선인 각료와 인재들의 진출 등의 과정을 거쳐서 일본 스스로가 조선독립시키게끔 단계적으로 밟아나가자고 역설한것이다.

평가

긍정적 평가

일제강점기 시절 문화관련 탄압으로 조선 문학의 한 줄기 빛처럼 등장한 문인이다. 그는 근대 문학과 현대 문학의 과도기를 튼튼히 받쳐준 인물이라고 평받기도 한다. 당시 대중들의 입맛에 편향되지 않고 계몽주의, 개인주의, 현실주의, 민족주의 등의 사상들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집필하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가부장제, 조혼풍습 등을 비판하기도 했다. 전통적 이념과 사상에 갇혀있지 않고 과도기에 걸맞는 근대적 사상을 중심으로 이를 전파하고자 하였으며, 민족주의와 계몽주의에 있어 힘쓴 인물이기도 하다. 무정은 한국 현대 소설계의 선두주자이며 한 획을 그은 명작이라고 평가하는 이들 또한 있다.

부정적 평가

임시정부 일원이자 독립운동가였지만, 일제의 압박과 회유를 이기지 못한 채 변절한 친일파 인물이다. 도산 안창호의 총애를 받고 그만큼 섬기며 수제자로 있던 그가 친일문학협회 조선문인협회의 회장으로 임할 정도로 적극적 친일파가 된 것이다. 또한 국수주의 파시즘 사상을 대중들에게 주입하려 했다는 평가도 있으며, 작품 '이순신'등 일부 작품들에서 역사의 왜곡이 드러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계몽주의적, 자유주의적 사상을 주로 삼은 것 또한 개인적 사상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른 이익적 태도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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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한국현대문학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성자 및 기여자

작성자 : 노경빈